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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조 Aug 15. 2023

불화는 때로 화해보다 낫다.

한강의 <채식주의자 >



불화는 때로 화해보다 낫다.
한강의 <채식주의자 >리뷰
by민조


 2016년 어느 날 한 소설이 쾌거를 이루었다. 언론은 연일 이 소설이 수상한 상이 얼마나 대단한지, 또 이 소설의 번역이 어찌나 매끄러웠는지에 대해 찬탄했다. 번역된 문장과 원래 문장을 한 줄 한 줄 정성 들여 비교해 놓은 기사들도 드물지 않게 눈에 띄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맨부커 상의 대단함이 아니라 한 독자의 짧은 한탄이었다. 채식주의자를 읽은 일부 독자들이 화자를 비판적으로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채식주의자의 화자의 정체가 궁금했다. 그래서 채식 주의자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곧 그들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채식주의자를 읽는 독자들은 전혀 다른 독서경험을 하게 되는 두 부류로 나뉠 가능성이 크다. 영혜의 남편인 화자와 끊임없이 불화하거나, 화자를 있는 그대로 내면화하거나.


 채식주의자의 화자는 영혜의 남편으로, 즉 남성 화자다. 전통적으로 문학 속에서 등장한 보편 인간으로서의 ‘나’가 실은 성차별적인 남성적 화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페미니즘 비평에서 꾸준히 지적해 온 바 있다. 이 소설은 이러한 남성 주체와, 이 남성적 주체가 타자화 하여 끝까지 미스터리와 공백으로 남는 여성 객체라는 구도를 빌려오고 있다. 화자인 영혜의 남편은 아내인 영혜뿐만 아니라 영혜의 언니와 같은 여성들을 묘사할 때마다 성적인 표현을 사용한다. 화자는 영혜에게 자신의 사회적 이득을 위해 행동할 것을 요구하고, 영혜가 이를 거부하는 듯한 행동을 보이자 화자는 이를 이상하게 여긴다. 화자의 관점으로 독자가 알 수 있는 건 영혜의 행동이 전과 다르며 몹시 기이하다는 사실뿐이다. 화자는 영혜의 심리를 전혀 알지 못하겠다는 진술로 일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이러한 익숙하고 성차별적인 형식에 영혜의 독백을 삽입하여 균열을 내고, 독자들이 영혜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준다. 이 균열은 이 소설이 그저 전통적이고 지겨운 여타의 소설들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영혜는 이 형식의 균열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자신의 서사를 되찾는다. 영혜의 행동을 보편적인 사회적 잣대로 평가한다면 그게 영혜의 남편이든, 독자든 영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보편성은 이미 남성적인 것으로 오염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영혜의 독백은 형식에 균열을 낼 뿐 아니라 이 소설을 이해할 실마리가 되어 주기도 한다.  바로, 이 소설이 전통적인 기호들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다.  


 앞서 익숙한 남성 화자의 독백 중간에 영혜의 독백을 삽입하여 익숙한 형식에 균열을 냈듯이, 이번엔 채식이라는 익숙한 상징에 균열을 낸다. 이 소설에서 채식은 환경과 박애가 아닌 자기 파괴를 표상하고, 이 자기 파괴는 타인을 파괴하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되었다. 고깃덩이가 자신과 닮아 보여서 못 먹겠다고 영혜가 남편을 향해 말하고 있지만 독자를 향하는 영혜의 독백은 사뭇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발화와 달리 독백에서 영혜는 고깃덩이를 썰고 싶은 충동을 지나치게 느끼고 있음을 고백한다. 즉 고깃덩이라는 피해자적 위치에 이입하고 있는 듯한 대사는 사실 사회적으로 허용되도록 정제되고 왜곡된 발화이며, 실제로 영혜가 느끼고 있는 것은 고깃덩이처럼 사회적 억압을 썰어버리는 자신이다. 이 소설에서 나타난 채식은 오히려 사회에서 보는 것과 정반대인 폭력에 가깝다.  


 영혜가 파괴 욕구를 자기 파괴로 돌리고, 그 수단으로 채식을 선택한 것은 여성의 사회화와 관련이 있다. 여성은 자신의 경험을 듣기 좋게, 거슬리지 않게 발화하길 요구받으며 때론 완전히 침묵할 것을 요구받기 까지 한다. 파괴 욕구, 폭력성은 어떤 사회에서든 여성에게 허용되지 않는 특성 중 하나다. 따라서 영혜는 자신의 파괴욕을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방식으로 해소할 필요가 있었다. 보수적인 한국사회에서는 작중에서도 드러났듯이 채식주의조차 독특한 행위로 여겨지지만 사실 채식주의는 여성의 젠더 역할 규범을 크게 거스르지 않는다. 따라서 영혜가 파괴욕을 표출할 비교적 안전한 통로로 채식주의를 선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상징의 파괴는 사회가 감춰둔 진실에 다가가는 실마리가 된다. 그 진실이란 관습적이고 보편적인 형식이나 상징들이 실제 여성의 경험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남성 화자는 여성에 적극적으로 무지하며 채식 행위의 대표성 역시 여성을 반영하지 못한다. 그렇게 여성과 관습은 끊임없이 불화한다. 이 불화는 영혜와 영혜의 남편, 혹은 영혜와 영혜의 친정식구들 사이로 이어지는 것을 넘어 책의 외부로도 나아간다. 독자와 화자 사이의 불화로, 때로는 독자들 사이의 불화로도 이어지는 것이다.


 이 불화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여성과 세상은 화해할 수 있는가? 적어도 영혜는 불가능하다고 본 것 같다. 결말에서 육식을 다시 시작한 영혜의 모습이 강렬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생생하고 원초적인 묘사라는 기술적 측면으로 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 장면이 영혜의 선언으로 느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영혜의 육식은 영혜가 자신의 욕구를 기만적이고 왜곡된 방식으로 드러내온 채식 행위를 그만두겠다는 선언이다. 영혜의 채식이 여성 억압을 내재화한 불완전한 항의 수단이었던 것처럼, 약자는 세상과의 불화를 해결하려는 노력과 자기기만적 행위 사이의 차이를 두기가 어렵다. 우리는 자기기만과 불화 사이에서 끊임없이 균형을 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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