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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조 Aug 13. 2023

19세기의 여성작가, 남자주인공을 처벌하다.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19세기의 여성작가, 남자주인공을 처벌하다.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리뷰
by 민조


 폭풍의 언덕이 쓰인 19세기 중반은 악명 높은 빅토리아 시대다. 그 시대를 대표하는 두 가지 중요한 축은 종교와 가부장제이다. 기독교가 행정을 관활하던 중세는 끝났지만 여전히 미풍양속 전반을 아우르던 시기였다. 당시의 억압적인 가부장제는 기독교적 교리에 영향을 받기도 했지만 의외로 당대의 과학적 발견들이 영향을 미치기도 해서 그 시대만의 독특한 특징이 존재했다. 지금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끈질기게 전해져 내려오는 생물학적인 괴담, 여성이 남성보다 생물학적으로 열등하다는 표어는 바로 이 시기에 탄생했다. 폭풍의 언덕은 이 두 가지 축을 중심으로 하는 당대의 신념 들을 과감히 조롱한다.


 종교적 교리가 해결해주지 못하는 시골 귀족 가정 내 작은 지옥, 아동학대가 생생히 묘사된다. 다만 그것이 한 번에 눈에 들어오진 않는데, 그 이유는 빈곤한 고아인 히스클리프가 비슷한 시기에 쓰인 다른 소설과 같이 구빈원이나 악명 높은 19세기 공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폭풍의 언덕이라는 생뚱맞은, 영 역사적 현실에서 동떨어져 보이는 장소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을 당시의 사회적 문제와 연결 짓기가 어렵다. 학대의 현장에서 종교는 상황을 바로잡아주지 못하고, 그저 누군가를 저주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결말을 어떻게든 받아들이고 싶은 인간들의 가련한 발버둥에 쓰일 뿐이다.


 이 소설에서 기독교는 오히려 초반부에 등장하는 캐서린의 영혼이라는 컬트적 요소에 완전히 압도당하고 패배하기까지 한다. 소설에서 종교보다 더욱 설득력 있고 강렬해 보이는 것은 개인의 영혼과 열정이다. 조지 영감이나 하녀 딘 부인 같은 전형적인 빅토리안 시대의 인물들은 캐서린이 살아 있을 적엔 캐서린의 열정을 두려워하고, 캐서린이 죽은 후엔 캐서린의 영혼을 두려워하며 마치 교리가 귀신을 퇴치하는 주문인 것처럼 읊조리곤 한다. 그러나 그들의 주문은 허공으로 흩어지며, 히스클리프는 여전히 캐서린이 살아있다고 믿으며 광기를 보인다. 또한 19세기의 가부장제가 이 소설에서 비틀리고 조롱당하는 방식은 종교의 그것과는 사뭇 양상이 다르다. 주인공들의 입을 빌려 대놓고 조롱당하는 종교와 달리 가부장제는 좀 더 은밀한 방식으로 거스르는다.

 

 캐서린은 ‘죽은 여자’라는 영문학적 전통을 따르는 캐릭터다. 그녀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랑으로 인해 미쳐가고, 끝내 아름다운 시체가 되어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은 햄릿의 오필리어가 연상되기도 한다. 특히 소설에서 그녀의 시체가 묘사되는 장면은 햄릿의 그 유명한 구절과 비슷한 구석이 있다.


 다만 캐서린이 그 전통과 다른 점이라면 그녀가 진정한 사랑인 히스클리프 대신 에드가를 그녀의 의지로 선택했다는 점이다. 보통 폭풍의 언덕은 독특하고 강렬한 로맨스 소설로 일컬어지곤 한다. 나 또한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폭풍의 언덕은 분명 로맨스 소설이다. 히스클리프가 얼마나 폭력적이든 그가 에드가 보다 훨씬 더 매력적이며 생동감 넘치는 인물이고 따라서 로맨스 히어로라는 위치에 적합한 남성 캐릭터라는 사실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 부분에 집중하여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이 이루어졌다면 에드가와의 결혼 생활과 다른 결말을 맞이했으리라는 의견엔 동의할 수 없다. 캐서린이 히스클리프와 이루어지는 것이 조금 더 그녀 자신 다운 선택이라는 데에도 동의할 수 없다. 캐서린은 당대의 관습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인물이었고, 캐서린의 광증은 오필리어의 순종적이고 조용한 그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캐서린과 재회한 히스클리프는 에드가와 힌들리를 마구 휘두를 정도로 힘 있는 가부장이었던 데다가,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오빠 힌들리는 무력했기 때문에 또 다른 가부장이 곁에 없는 캐서린은 얼마든지 히스클리프를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캐서린은 히스클리프를 선택하지 않고 에드가와의 결혼 생활을 선택했다.


 나는 그 이유를, 이 소설이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가부장이라는 점에서는 닮아 있는 두 남성 캐릭터를 처벌하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캐서린의 행방은 두 가부장을 모두 처벌했다. 보통 폭풍의 언덕을 읽은 사람들은 캐서린이 광증을 보인 이유는 히스클리프와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며, 이루어지지 못한 까닭은 에드가로 대표되는 가부장제 탓으로 돌리곤 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히스클리프 또한 가부장이었다. 하지만 에드가와는 다른 종류의 가부장이었고, 그래서 캐서린은 히스클리프를 선택하지 않았으며 에드가와 히스클리프에게 각각 다른 형태의 처벌을 내린 것이다.


 여기서 우선 캐서린의 어린 시절 폭풍의 언덕 저택에서 캐서린의 오빠 힌들리가 갑자기 소설에서 무력해졌던 사건을 짚고 넘어가고 싶다. 어린 캐서린과 히스클리프를 학대하던 힌들리는 매우 갑작스럽게 퇴장했는데, 그의 부인이 우연히 병을 얻고 죽고 나자 그 오빠도 부인을 그리워하다가 미쳐버린 것이다. 이 소설에서 '사랑하는 여자의 죽음’이 억압적인 가부장에 대한 처벌처럼 쓰인 또 하나의 사례다.


 히스클리프는 흔히 ‘바이런적 영웅’이라 불리는, 현대 소설에 와선 흔한 유형이지만 당시엔 꽤 새로운 남성성을 가지고 있었다. 제국의 남성이 문화적이고 신사적인 남성이라면 바이런적 남성은 거칠고 야생적이다. 후자는 굳건한 제국 남성성에 대항하는 대안적 남성상으로 곧잘 해석된다. 따라서 사람들은 히스클리프의 바이런적 남성성이 에드가의 제국적 남성성에 대항하고 있기 때문에 캐서린이 히스클리프를 선택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지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캐서린은 대다수의 독자들과는 생각이 달랐던 것 같다. 캐서린은 히스클리프에 대한 견해, 즉 히스클리프를 선택하지 않는 이유를 작중에서도 분명히 한다. 에드가에게 캐서린을 빼앗겼다고 생각한 히스클리프가 복수하기 위해 에드가의 여동생을 유혹했을 때, 캐서린이 히스클리프와 사랑에 빠진 에드가의 동생에게 히스클리프는 행복한 결혼생활에 맞지 않는 인물이라며 경고하는 말에서 알 수 있다. 이때 캐서린은 에드가의 동생을 질투조차 하지 않았다. 캐서린의 경고대로 에드가의 동생은 히스클리프에게서 도망치는 것으로 결혼 생활을 마무리한다. 이때 재미있는 것은 캐서린이 에드가의 동생에게 충고했을 때, 자신만은 그 불행을 피할 수 있었으리라고 자만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폭풍의 언덕의 불후의 명대사, 히스틀리프가 나고 내가 히스클리프야, 에서 나타나는 캐서린의 자기 인식에도 불구하고 캐서린은 자신이 히스클리프에게 학대당하지 않을 것을 확신한 적이 없다.


 또한 히스클리프의 폭력적인 가부장성은 그가 에드가의 여동생을 학대한 것에서도 드러나지만, 그가 에드가의 여동생을 오로지 자신의 생물학적 후계자를 낳아줄 수단으로만 간주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캐서린의 판단이 정확했던 것이다. 히스클리프의 이러한 특성을 보면 단순히 그의 비천한 신분과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에드가의 굳건한 가부장적 지위에 밀려 캐서린에게 거부당한 것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미 그는 에드가라는 가부장의 휘하에 있는 여동생을 낚아챘다. 그렇다면 에드가라는 확고한 가부장에 비해 무력했기에 실패했다는 해석과는 잘 들어맞지 않는다.


 캐서린은 오히려 히스클리프의 가부장적 특성을 직시하고, 차악으로 에드가를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바이런적 영웅의 정점은 사랑하는 여자와의 결혼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획득에만 있다. 바이런적 영웅들에겐 결혼생활을 유지할 책임과 의무가 없다. 그들은 거칠고 열정적인 만큼 불안정하며 그것이 그들의 미덕이기 때문이다. 캐서린은 히스클리프의 구애를 거절함으로써 그 바이런적 남성이 도달해야 하는 것을 좌절시킨다.


 에드가와 같은 신사들, 제국의 남성들은 사랑하는 여성의 획득보다는 결혼 생활 유지를 통한 부의 세속과 재산의 확대가 더 중요하다. 어쩌면 에드가가 일견 더 부드러운 태도를 지닐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좀 더 전통적인 권위를 등에 업고 현상 유지만 해도 된다는 사실 때문일 수도 있다. 에드가와 같은 유서깊은 가문의 남성들은 여성에게 구애를 거절당해도 크게 손해가 없다. 그저 다른 가문의 여성에게 구애하면 될 일이다. 캐서린은 그의 구애를 받아들였다. 대신 에드가가 다른 유형의 남성, 히스클리프에 의해 패배하게 만들고 그 자신의 광증과 죽음으로 결혼 생활과 가정의 존속을 망친다. 에드가의 재산과 가문은 캐서린과 캐서린이 끌어들인 히스클리프로 인해 박살이 났다.


 여성은 감정을, 남성은 이성을 담당하는 이분법 역시 오래된 영문학적 전통이다. 감정이 이성보다 유약하다는 위계 또한 굳건히 자리를 지켜왔다. 이 소설은 감정을 대표하는 폭풍의 언덕, 캐서린, 히스클리프가 이성의 티티새 지나는 농원, 에드가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과정을 통해 이 도식을 전복시킨다. 오히려 이성은 무력하고 지루하며, 감정은 강렬하고 몹시 강하다.

 이성으로 무장한 제국의 남성은 다가올 감정적인 바이런 남성의 먹잇감이고, 그 바이런 남성의 시대 또한 그 남성 자신의 약점으로 무너질 것이다.  폭풍의 언덕의 결말에서 히스클리프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후세대들의 행복한 결말이 19세기 문학 특유의 보수성을 지키기 위한 장치라고 보는 견해가 많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 결말이 히스클리프라는 새로운 유형의 가부장의 실패를 의미하기도 한다고 생각한다. 부계의 상속은 가부장제의 목적이자 대표적인 특징이고, 히스클리프는 자신의 아들에게 자신의 유산을 상속하고자 했고 이에 실패하자 캐서린의 후손들을 폭력의 굴레에 가둠으로써 이번엔 폭력 그 자체를 대물림 하고자 했다. 히스클리프의 죽음으로 이 후손들이 히스클리프로부터 자유로워진 결말은 히스클리프가 후계자 양성에의 실패, 즉 가부장으로서 실패했음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히스클리프가 죽게 된 것은 결국 그가 종류는 다르지만 에드가와 같은 가부장이었기 때문이다.


 폭풍의 언덕은 강렬한 사랑 이야기이다. 히스클리프가 자신이고 자신이 히스클리프라는 캐서린의 선언은 무척 매혹적이며, 아마도 후대의 수많은 로맨스 소설의 주인공들의 관계성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사랑하는 이에게 자기를 투사하는 것은 지금은 그리 독특한 아이디어는 아니지만 분명 당시엔 흔치 않았을 것이다. 폭풍의 언덕을 처음 읽었을 땐 캐서린이 히스클리프에게 스스로를 투사하고 동일시하는 열정적인 사랑에 매료되었다. 그러나 재독서를 하자 조금씩 다른 면모가 보이기 시작했다. 정신적으로 끝내 길들여지지 않고 세상의 도덕률에서 물리적으로도 격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던 캐서린이, 그녀를 옭아매던 오빠가 사라지고 오히려 히스클리프가 더욱 강대해져 돌아와 히스클리프를 선택하는데 거칠 것이 없어 보이는 캐서린이 도대체 왜 에드가를 선택했을까? 왜 히스클리프와 함께하지 않기를 선택했을까? 다른 해석들을 살펴보았지만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내 눈엔 조금씩 만족스럽지 못했다.


 어쩌면 나도 캐서린이 히스클리프에게 스스로를 투사하듯이, 혹은 소설의 화자인 딘 부인이 캐서린과 히스클리프를 오해하듯이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와 에드가를 바라봤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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