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이가 엄마와 크리스마스트리를 꾸미고 있다. 딸은 아들에게 추억을 만들어 주겠다고 트리와 장식을 사 왔다. 초록 가지에 금빛 선물상자, 지팡이, 실버벨, 제일 위에는 다윗의 별을 매달고 전기코드를 꽂으니 하얀 조그만 전구들이 반짝반짝 빛난다. 석이는 방안에 트리와 징글벨 노래가 울려 퍼지니 무척이나 즐거워한다.
나는 오늘 천국으로 가신 외숙모와의 추억을 호랑가시나무 트리에 하나씩 매단다. 정원의 호랑가시나무는 X-mas 카드에 그 잎이 그려져 있어 열세 살 소녀인 내 눈엔 친근한 나무였다. 그 나무에 솜을 얹어놓고 색종이 고리를 휘감고 기뻐했었다.
< 추억 1 >
어린 시절 동갑인 외사촌 여동생에게 자주 놀러 갔다. 외삼촌 댁은 서울역 앞에서 남산 쪽으로 올라가다 후암동과 갈라지는 곳에 일본식 집 여러 채 가운데 하나였다. 양 옆집에 동갑내기 친구들이 있어서 넷이서 2층 베란다에서 기왓장 몇 개 밟고 이 집 저 집으로 건너 다니며 놀았다.
현관에 들어서면 마루보다 낮은 부엌에는 밥 짓는 수증기가 가득한 가운데 외숙모가 얼굴을 내밀며 환한 웃음으로 반겨 주셨다. 외숙모는 다섯 자녀를 두었는데 나보다 한 달 늦게 태어난 여동생, 위로 개구쟁이 오빠와 그 아래로 동생이 셋 있었다. 매일 아이들이 위아래층으로 우당탕거리며 뛰어다녔다. 나는 그 자유로움이 좋아 자주 이곳에 왔고 안방에 달린 벽장 속에서 여동생과 자는 것도 즐거웠다. 홀로 되신 이모와 이종사촌 오빠도 함께 살고 있었다. 그리고도 늘 객식구가 한두 명 있었다.
시골서 올라오는 친척들은 이곳을 자기 집처럼 편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외숙모는 사람이 너무 좋아 전혀 눈치를 안 주고 편했기 때문이다. 대식구가 커다란 두레 반에 둘러앉아 식사하는 시간은 시끌벅적했다. 부엌과 안방 사이에 밥그릇, 국그릇이 드나드는 조그만 창이 있어서 조금은 편리했다. 하지만 끼니마다 그 많은 밥과 국, 반찬을 해대느라 외숙모는 그렇게 늘 수증기 속에서 사셨다. 수증기가 가득한 스노볼 하나를 트리에 매단다.
< 추억 2 >
아버지는 공무원이셨는데 서울로 발령이 나서 온 식구가 이사를 하고 나는 중 1학년에 금방 입학한 후라 전학이 안 되어서 혼자 남았다. 다행이라면 아버지의 후임으로 외삼촌이 오셔서 나는 관사에서 반년을 외숙모 밥을 먹고 지냈다. 어느 날 여학생 몇 명이 외숙모를 만나서 이야기를 하더니 외출 허락이 떨어졌다. 언니들을 따라 읍내의 중국집으로 가니 2층 넓은 다다미방에 한 20여 명의 여학생이 앉아 있었다. 나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시켜주는 짜장면을 맛있게 들었다. 그 학교에는 중1부터 고3까지 함께 있었는데 클럽이 두 개 있었다. 그날은 그중 하나인 물망초클럽 신입생 환영식이었다. 입학할 때는 성적이 좋았는데 그 반년을 너무 자유롭게 놀아서 사실 중간고사 시험을 엉망으로 보았다. 속으로 걱정스러웠는데 서울서 올라오라는 소식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랐다. 나는 1학기를 마치고 여름방학에 서울로 전학을 갔다. 그러기에 그 클럽이 무슨 활동을 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참 기억에 남는 장면이다. 두 번째 볼에 여학생들의 회식 장면이 볼록거울에 잡혔다.
< 추억 3 >
내가 딸을 낳아 키울 때 외숙모는 우리 집에 오실 때면 커다란 보따리를 들고 오셨다. 그것을 풀면 예쁜 아기 옷들이 쏟아져 나왔다. 외사촌 여동생이 일본에 살았는데 나보다 먼저 두 딸을 낳아 키웠다. 당신 짐이 많았을 텐데도 그것을 비행기에 싣고 오신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따뜻한 감동이 밀려온다. 딸아이 입힌 후에 동서와 두 시누이 집의 조카딸 셋에게 내리 입혔다. 지금은 모두 다 아기 엄마가 되었지만, 사진을 보면 어렸을 적 특히나 예쁜 옷을 입고 자란 것이 참 즐거웠다고 추억을 한다. 아마 지금까지 두었으면 딸의 딸인 민아까지 입어도 좋을 그런 고급 모직으로 만든 옷들이었다. 지금은 택배가 발달해서 집에서 집으로 가져다주지만, 그 당시 외숙모는 버스를 타고 보따리를 가지고 오셨다. 그 수고와 사랑에 보답은 못 하였지만 나와 딸은 외숙모와 같은 행동을 하는 것으로 사랑을 실천한다. 그 옷을 물려받아 입고 자란 조카딸 셋도 서로 옷과 물건을 주고받고 한다. 동서도 시누이들도 손자, 손녀들이 입던 옷들을 가지고 태평양을 오고 가고 한다. 그분은 떠나셨지만, 외숙모의 보따리가 스노볼에 가득하다.
< 추억 4 >
외숙모가 병환이 나서 누우신 지가 벌써 5년이 되었다. 아들, 손자, 손자며느리가 의사이므로 지극한 간호를 받으셔서 오히려 간병하던 외숙보다도 3년을 더 사셨다. 집에서 자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한 임종을 맞으셨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슬픈 가운데서도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는 외삼촌과 외숙모는 꼭 누님께 세배를 오셨다. 두 분이 돌아가신 후엔 언니와 내가 외삼촌, 외숙모께 세배하러 다녔다. 나중 치매가 오셔서 오락가락하는 가운데서도 언니와 내 이름을 부르며 좋아하셨다. 그리고는 늙어가는 생질녀들에게 세뱃돈을 주시며 기뻐하시던 그런 사랑이 넘치는 외숙모였다. 언니와 내가 볼 속에서 외숙모께 절을 하고 있다.
< 추억 5 >
스노볼이 사람들로 터질듯하다. 그동안 그분의 사랑과 도움을 받았던 모든 사람이 들어가 있다. 두 이모님 모자, 우리 오빠들, 일가친척들이다. 우리 아버지는 생전에 늘 말씀하셨다. 송덕비를 세워드려야 한다고. 내가 지금껏 겪어보았던 사람 중에 우리 외숙모처럼 많은 객식구 치다꺼리하고도 인자한 웃음이 떠나지 않던 분은 못 보았다. 아마 천국에서 지금 환영 행사 준비가 한창일 거다. 우리 아버지가 환영위원회 회장쯤 되실 것 같기도 하다.
우리 석이의 트리는 선물 보따리가 무거워서 축 처지고 있는데 내 마음의 트리에 매달려 있던 스노볼은 외숙모를 배웅하는 듯 하나씩 하늘을 향해 올라가고 있다. 외숙모님 안녕히 가세요. 그리고 먼저 가신 우리 어머니 아버지께도 안부 전해 주세요. 저희 가슴속에 사랑을 심어주시고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행실로 보여주신 후덕하신 외숙모. 오늘 95년 대단원의 삶을 마치고 천국으로 가시는군요. 외숙모님 진정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