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쇄적 시스템 속에만 있다가 세상에 나온다면
“여보는 한국 교육 제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갑자기? 설거지하다가 갑자기 면접 모드야? 글쎄,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12년인데, 그중 난 반밖에 한국에서 안 있었으니까 뭔가 문제인지 말할 경험이 부족하지 않을까 싶은데.”
“난 한국에서 쭉 컸잖아.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쭉. 근데 대학교 때부터 느꼈어. 학교에서 열심히 하는 거랑, 내가 성인이 된 후에 필요한 능력 간에 불일치가 있다고. 글쓰기를 가르치지 않다가 갑자기 대학교 오니까 리포트 스라고 하고. 토론 수업이나 발표도 없었는데 갑자기 조 짜서 뭔가 해서 나와서 말해보라고 하고. 회사 생활하니까 더해. 어른이 되고, 회사 생활을 하면서 뭔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세상은 국영수 중심으로 짜여있지 않은데, 학생이니까 일단 교과목을 삶의 중심에 두라고 강요하다가, 졸업하면 그 뒤는 책임 안 지는 거지. 근데 자기도 그렇고, 외국에서 공부한 친구들은 어렸을 때부터 쭉 연결된 느낌이랄까? 차근차근 준비해두고 어른 되어서는 그 역량을 쓰면서 사는 것 같아.”
“외국 시스템은 어렸을 때부터 선택을 시키니까 그런 것 같아. 사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는 어떤 과목을 들을지 스스로 수강신청을 하거든? 같은 과목도 난이도별로 3~4개 레벨이 개설되고, 모든 과목을 들을 수 있지 않기 때문에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해. 내가 나중에 어떤 대학을 무슨 전공으로 가고 싶은지 생각을 해놓아야 고등학교 다니는 동안 필요한 시험을 준비할 수 있어. 가령 내가 물리, 화학, 수학 중심으로 높은 레벨의 자격을 획득했다면, 갑자기 문학이나 인류학 전공 쪽으로 가기가 상당히 힘들어. 내가 아무리 우수한 학생이라고 해도, 대학별, 전공별로 요구되는 게 워낙 다르니까. 그러다 보니까 사실 진로나 향후 커리어에 대해 고민하는데 상당한 인풋을 투입해. 지금 생각하면 좋은 시스템 같지만... 그 시스템 안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애들이잖아?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된 아이들. 애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선택의 무게였던 것 같아. 나도 스트레스 많이 받았고.”
“한국은 사실 그런 게 전혀 없어. 입시 시스템이 복잡하지만, ‘그건 어떻게 해야 유리한가’에 맞춰져 있고, 내신이든 수능이든 점수가 높아지면 선택권도 넓어져. 선택의 무게가 아니라 경쟁의 무게만 있지. 나는 그 경쟁 속에서 앞서가려고 엄청 열심히 뛰었는데, 막상 세상에 나와보니까 정말 잘못된 자세로 뛰고 있었던 것 같아.”
“어떤 면에서 그렇다는 거야?”
“호환성이 부족해. 한국에서 공부를 잘하면 한국에서 대학을 잘 갈 수 있는 역량을 갖췄다는 것. 그뿐이야. 교육은 사실 적금 같은 거잖아? 지금 쌓아서 나중에 쓰는. 근데 한국 교육은 시험 치고 입시 통과하면 더 이상 유효하지가 않아. 대학교 이후 부딪치는 건 그냥 알아서 개인이 역량을 쌓아야 하고, 그전에 쌓아온 것들은 그렇게 힘들게 했는데도 큰 도움이 되지 않아.”
“그건 나도 외국에 있다가 한국에 돌아와서 확실히 느꼈어. 학습(learning)보다는 경쟁에 의한 선별(competitive selection)에 가깝더라고. 제일 충격적이었던 것은, 학생들이 책 읽는 것을 권장하지 않았다는 거. 시험에 나올법한 지문은 과할 정도로 반복적으로 훈련시키는데, 막상 그 지문이 나온 책 전체를 읽어보라고 하지 않더라고. 수학도 암기과목처럼 가르치고, 답만 내면 끝이어서 굉장히 놀랐어. 풀이나 증명 과정은 하나도 안 보여줘도 되더라고. 사회 시간에 토론이 없다는 것도 이상했고...”
“내 말이! 막상 어른이 되어보니까, 글을 읽어서 정보를 흡수하고, 그걸 소화해서 뭔가 산출물을 내놓고, 나와는 다른 관점에서 본 사람들과 조정하는 과정은 모든 분야에서 반드시 필요한 역량인데, 막상 12년 동안 그런 건 배운 기억이 없는 거야. 생각해보면 엄청 화나기도해. 그렇게 잠도 못 자게 하면서 시켜놓고 말이야.”
“나름 장점도 있지 않아? 외국 시스템은 너무 어렸을 때부터 선택과 집중을 시켜놓아서, 애 관심 분야가 아니면 정말 아무것도 몰라. 근데 한국 시스템은 전과목에 걸쳐서 일단 어느 정도 수준 이상은 끌어올려놓잖아.”
“그거야 교육부 관점에서는 그렇지. ‘전반적으로' 괜찮다는 거. 근데 사실 우리가 교육 정책이 거시적으로 괜찮은지 생각할 필요는 없잖아. 우리 아들이 계속 한국에서 학교를 다닌다면 어떨 것 같아?”
“음... 사실 만약 그래야 한다면 걱정이 많이 되기는 해.”
“어떤 면에서?”
“세상에 완전한 교육 시스템은 없거든? 근데 한국의 교육 시스템은 너무 동떨어져 있어. 오직 한국에서만 통용된다는 거지. 선택의 폭이 너무 좁아져. 가령 SAT나 A-level, 인터내셔널 바칼로레아(IB) 점수를 잘 받으면 전 세계에 갈 수 있는 대학들이 많아. 근데 한국에서 공부를 잘하면, 오로지 한국에서만 우등생 취급을 받을 수 있어. 달리기 선수로 치면 딱 한 군데에 있는 경기장에서만 뛰어야 되는 거지. 근데 그 경기장에 선수들이 많으니까 경쟁이 너무 심해. 그 경기장에서 앞서갈 노력이면, 사실 올림픽 나가도 될 텐데 말이야.”
“우리 아들 외국 대학 보내게?”
“꼭 그래야 한다는 건 아니야. 한국 대학도 난 좋다고 생각해. 경쟁력도 있고, 대학교들은 막대한 재원을 투입해서 스스로 발전하려고 하고, 앞으로도 꾸준히 할 거야. 근데 고등학교까지의 한국 교육 시스템 속에서만 아이를 키우는 건, 가능하다면 피하고 싶은 선택이야.”
“그 정도로? 경쟁이 심해서?”
“경쟁은 어딜 가나 심해. 목표가 높아질수록 심해지고. 내가 문제라고 생각되는 건 한국 교육 시스템의 폐쇄성이야. 단순히 수능점수로는 외국 대학을 못 간다는 문제보다 조금 더 깊은 문제. 한국 시스템은 정답은 정해져 있고, 제일 많이 맞추는 사람을 선별하는 경쟁이란 말이지? 이런 식으로 아이가 사고하게 놔둬버리면 나중에 커서도 ‘정답'만 찾으려고 해. 실제 세상은 OMR 카드가 아닌데 말이지.”
“사실 나도 그건 진짜 공감해. 한국식 교육을 받다가 막상 세상에 나오니까, 스스로 답을 찾는 연습이 전혀 안되었다고 느꼈거든. 그럼 자기는 어떻게 하고 싶어?”
“일단 한국 교육 시스템 속에서의 성과 지표에 연연하면서 키우지 않고 싶어. 만약 구체적인 목표와 계획이 있다면, 자퇴하고 다른 시스템 속에서 역량을 쌓게 해주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해. 검정고시만 보고 나서 가고 싶은 대학이나 다른 진로에 맞춰서 준비를 시킨다거나. 만약 대학을 가지 않고 다른 길로 가겠다고 하면, 학교에 묶어놓는 대신 차라리 아이가 선택한 길을 잘 갈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게 낫지 않을까?”
“나도 그래.”
“정말? 의외다! 사실 자기는 워낙 모범생으로 커서 내가 이런 이야기 하면 이상한 생각이라고 말할 줄 알았는데.”
“말했잖아. 한국 교육 시스템 속에서 잘해도, 장기적으로 보면 비용 대비 효용이 많이 떨어진다는 것을 누구보다 절실히 느꼈다고. 근데 우리 아들이 대학도 가기 싫고, 진로도 생각 없으면 어쩌지?”
“군대부터 보내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