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변해도 교육제도는 그대로인데, 그래도 시험과 성적이 중요할까
아들에게,
"기업은 시속 100마일로 변화하고 시민단체가 90마일, 가족이 60마일, 노동조합이 30마일, 정부가 25마일, 공교육이 10마일, UN을 비롯한 다국적 기구가 5마일, 정치조직이 3마일, 법과 법기관이 1마일로 변화한다"
- '부의 미래' (알빈 토플러, 2007)
이 책이 쓰여진 2007년과 지금만 비교해도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그러나 공교육은 여전히 그대로이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더 높다. 교육은 변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1980년대에 태어나서 1990년대에 학교를 다닌 아빠와 2020년에 태어난 너는 아마 비슷한 교육을 받게 될 가능성이 높다. 교과서의 표지와 입시 제도는 많이 바뀌어도, 그 안의 내용과 전달 방식은 거의 변화하지 않을 것이다.
너의 교육에 관해 엄마와 함께 이야기를 할수록 고민이 더욱 커져만 간다. 세상에 너무나 많은 것들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모습이 빤히 눈 앞에 보이기는 하는데, 반세기 넘게 업데이트 되지 않은 교육제도 속에서 치뤄지는 시험과 그 결과(성적)에 대해 아빠와 엄마는 얼마나 신경을 써야 하는걸까?
아빠와 엄마는 미래를 살아갈 너에겐 아래 세 가지 능력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첫 번째는 다른 나라, 다른 문화, 다른 문명권에서 온 사람과 소통하는 능력이다.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범위는 내가 속한 조직에 국한되지 않으며, 전 세계로 넓어진다. 익숙해질 듯하면, 다른 프로젝트로 넘어가서 새로운 사람들과 일해야 한다.
두 번째는 다른 분야의 사람과 협업하는 능력이다. 평생 한 분야만 파서 그 분야에서만 전문가가 되는 것으로는 이제 충분하지 않고, 서로 연관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 분야 간에도 협업도 이루어진다. 미래사회의 부가가치는 전문 분야 간의 통섭을 통해 창출된다. 한 분야에만 갇혀있는 사람일수록 인공지능과 신기술에 쉽게 대체될 것이다. 하나의 전문성을 탄탄하게 잡되, 다른 분야에 대한 정보도 지속적으로 흡수하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세 번째는 내 생각에 반대하는 사람과 협의하는 능력이다. 더불어 살기에는 서로를 너무 모르고, 따로 살기에는 너무 좁아졌다. 물리적 거리가 멀어져도 기술 덕분에 (사이버 공간에서)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과 쉽게 부딪칠 수 있게 되었다. 인구가 고령화되면서 다른 시간을 살아온 세대 간 반목이 심화되고, 사회가 다변화되고 국경과 장벽이 낮아지면서 다른 공간에서 생각이 형성된 사람들 간 충돌도 잦아진다. 이러한 충돌의 일상화 속에서 다른 시각을 조율하고, 갈등을 조정하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 중심에 서게 된다.
이러한 능력들을 학교에서 배울 수 있을까? 다양한 문화와 소통하는 능력을 배우기에는 아직 한국 교육제도에 다자화 된 의식이 부족하다. 다른 분야와의 소통은 억제되고, 문과, 이과, 예체능으로 격리된 채 교육이 이루어진다. 획일화된 콘텐츠를 교육시키기 때문에 시각의 차이를 좁히는 연습보다는 정답을 찾기 위한 훈련이 우선시 된다.
오늘날의 우리나라 교육은 예전 아빠엄마가 배우던 시대의 그것과 내용, 방식 면에서 똑같다. 그리고 그 목적은 오로지 하나이다: 입시. 목적이 하나이다 보니, 아무리 입시제도가 변하더라도 교육의 알맹이나 전달 방식은 개선되지 않는다. 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에서는 학생 모두가 대학만을 향해 달려가도록 건물 안에 아이들을 가두어 놓는데,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냉혹할 정도로 방치한다. 미래에 필요한 재능과 역량을 배양하는데에 적합한 시스템은 아니다. 사교육은 공교육보다는 훨씬 더 효율적이지만, 대안을 제시하기보다는 혹독한 경쟁 속에서 모두를 제치고 누구보다도 먼저 앞서 나가는 방법에만 집중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와 엄마는 네가 학교를 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는데 비해 교육은 변하지 않는다고 비판했지만, 이 말이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이 무의미해졌다는 뜻은 아니다. 그렇다면 교육이 변하지 않은 이유가 뭘까? 세상이 변해도 배워야 하는 것들이 있고, 학교는 여전히 그러한 것들을 가르쳐야 하기 때문이다. 컴퓨터가 아무리 진화해도 필수 프로그램들은 그 포맷이나 인터페이스만 바뀔 뿐, 그 자체가 없어지지는 않는다.
학교는 첫 사회생활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지식과 정보의 습득에만 집중한다면, 개인에게 특화된 교과과정으로 혼자 학습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다. 하지만 갈등관리, 팀워크, 의사소통, 설득하기, 리더십과 같은 역량들은 학교에서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과 서로 부딪히면서 서서히 길러진다.
다만, 학교라는 제도에 지나치게 구속되거나 그 안에서의 경쟁에 매몰될 필요는 없다. 시험은 네가 학교에서 전달한 지식을 잘 습득했는지를 보여주는 도구일 뿐, 경주가 아니다. 충분히 지식을 익혔다면, 다른 친구들보다 더 열심히 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너의 에너지를 쏟기보다, 네가 흥미를 느낀 새로운 것에 호기심을 가지는 게 더 낫다.
지금과 같은 인구 추세가 계속된다면 더 이상 너에게 대학 진학 자체가 어려운 일은 아니게 될 것이다. 대학교 정원보다 지원하는 학생 수가 더 적어지니까. 그러나 소위 명문대와 미래 유망 직종 관련 학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여전히 높은 경쟁률을 뚫어야 할 것이다. 네가 가고 싶은 대학이나 공부하고 싶은 전공이 있다면, 선발 경쟁은 여전히 치열할 것이다. 세상이 변한다고 했지, 절대 쉬워지진 않는다.
그래서 사실 아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네가 '대학을 가야 하는 이유'를 찾는 것이다. 물론 너의 선택에 따라 '대학에 가지 않는 이유'가 될 수도 있다. 두 가지 경우 모두, 너에게 분명한 이유만 있다면 아빠는 그 선택을 충분히 존중할 것이다.
대학에 가게 된다면 어떤 전공을 하고 싶은지, 왜 그 전공을 하고 싶은지, 나중에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한 너만의 답이 있어야 한다. 고등학교까지는 잘 짜여진 트랙을 따라 달리는 육상 경기와 같은 느낌이라면, 대학교부터는 목적지와 루트를 직접 짜서 달려야 하는 트레일 러닝과 같다. 왜 뛰는지, 어디로 뛰는지를 네가 모르면 분명 헤매게 된다. 물론 뛰다가도 중간에 목적지와 코스를 바꾸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인생의 방향에 대한 고민을 스스로 해보고, 나름의 답을 구하는 과정을 네가 살면서 한 번 쯤은 반드시 겪어보기를 바란다.
대학에 가지 않는다면, 마찬가지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떠한 역량을 키우고 싶은지 충분히 고민하고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다. 그것도 잘 모르겠다면, 군대를 먼저 가는 것도 괜찮다. 하고 싶은 것이 명확히 있는데 대학교육이 딱히 필요하지 않다면, 대학을 가지 않는 것이 합리적이다. 돈은 나중에 벌 수 있지만, 시간은 벌 수 없다. 필요하지 않은데 대학에 시간을 쏟을 이유가 전혀 없다.
네가 스스로 선택하기 위해 필요한 경험과 지식을 갖추도록 도와주는 것이 아빠의 역할이다.
공부를 못한다고 혼나진 않겠지만, 네가 시험 중에 커닝을 하면 혼이 날 거다. 경쟁에서 지더라도 괜찮다. 대신 공정하게 경쟁해라. 경쟁보다는 협동을, 이기는 것보다는 봉사를 잘했으면 좋겠다. 시험에서 만점을 받기보다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고,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효과적으로 전달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공부를 잘 하는 것도 좋겠지만, 아빠는 오히려 네가 주변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모습을 볼 때 더 자랑스러울 것 같다.
국어를 잘하면 좋겠지만, 말이 상대방을 아프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수학을 잘하면 여러모로 편리하지만, 가진 것을 나눈다고 꼭 손해는 아니라는 원칙을 깨달아야 한다. 영어나 외국어를 잘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다른 국적, 문화,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열린 마음으로 대하는 것을 먼저 배웠으면 좋겠다. 운동을 잘하면 손뼉을 치겠지만, 스포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페어플레이와 협동심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음악을 잘하면 놀랍겠지만, 세상에서 가장 귀 기울여 들어야 하는 소리는 다른 사람의 말이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길 바란다. 미술을 잘하면 기특하겠지만, 네가 앞으로 만날 세상과 사람들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시각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의 불씨가 꺼지지 않길 바란다.
절대 쉬운 길은 아니겠지만, 엄마, 아빠도 함께 배우면서 너와 같이 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