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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담 Dec 03. 2021

21살, 부업, 2천만 원  나를 이루는 키워드

차상위계층 여중생에서 21살에 자산 2000만 원 달성까지의 여정

  그렇다. 나는 가난하다.

  7년 전에도 가난했고, 지금도 그렇다. 차상위 계층이라는 키워드로 분류된 지 약 7년 만에 나는 그 키워드를 내 몸에서 살짝 떼어낼 수 있었지만, 폐암 치료를 위해서 일을 그만두신 어머님, 혼자서 가족의 생활을 위해 일하는, 타 지역에서 제대로 된 집 하나 없이 지내는 아버지... 그렇다. 7년 전, 아무것도 없이 빚만 가득했던 삶보다 조금 나아진 것뿐, 여전히 "평균의 삶"을 살지 못하는 21살 대학생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대학을 다닐 수 있는 형편은 가난하다고 말할 수 없다. 일부는 동의한다. 정말 찢어지게 가난했다면 바로 취직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을 테니까. 어쩌면 나는 국가장학금을 받으면서 근로장학생으로 학교를 위해 일을 하고 졸업 후 바로 취직할 수 있는 간호학과에 들어왔기 때문에 대학교를 다닐 수 있는 상황이었을지도... 하지만 사람들이 간과하는 사실이 있다. 어중간하게 가난한 사람들은 가진 거에 비해 보이는 게 더 많아서 괴로울 때가 많다. 남들 다 사 입는 교복을 나는 물려받았다. 사이즈도 내 몸이 자라면 바꿔줄 형편이 안되었기 때문에 2~3 사이즈 큰 옷들을 골라야만 했다. 남들은 쉽게 사용하는 스마트폰을 나는 중학교 3학년 때 처음 써봤다. 카카오톡이 없던 1년은 정말 지금 생각해도 외로웠다. 남들 다 받는 용돈을 나는 고등학교 올라와서 겨우 받았다. 한 달에 3만 원, 하루에 천 원 받은 셈이다. 이 돈을 주기 위해서 더 아끼셔야 했던 어머니,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고생이란 고생은 다한 것 같다.



  나는 이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리고 소소하지만 나에게는 정말 큰돈인 2000만 원을 21살에 모았다. 이 글을 통해 어쩌면 나와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는 사람들에게 조금의 위로를 전하고 싶다.



중국에서 부족함 없이 자라던 아이가 처음으로 겪은 가난


  나는 한국에서 태어난 지 약 60일이 지난 시점, 가족의 품에 안겨 중국 하문이라는 섬 도시로 이사 가게 된다. 그때는 아버지가 나름 고액의 월급을 받아서 부족함 없이 살았다고 한다. 실제로 나는 국제학교를 유치원 때부터 다녔고, 역세권 바로 앞 상가와 아파트도 구매를 했었을 정도로 넉넉한 형편이라고 했다. 너무 어릴 때의 일이라서 잘 기억은 안 난다. 하지만 정신 차려보니 나는 잘 사는 친구들이 있었고, 국제학교 덕분에 중국어, 영어, 한국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렇게 평생 살아갈 줄 알았다. 심지어 가장 재정적으로 가장 힘들었을 때 우리가 살던 아파트는 40평대였다고 한다. 아버지가 다니던 회사가 망하고 새로운 회사로 이직하는 대신에 사업을 택했던 아버지는 상가와 아파트를 팔아 자본을 마련했지만, 한국인이 중국에서 사업을 유지하는 건 현지인의 투자와 도움 없이는 힘들다. 그리고 실제로 겨우 연명하던 그때 나는 국제학교에서 강제로 학비가 더 저렴한 학교로 전학을 가야 했다. 솔직히 너무 이상했다. 한 평생 함께했던 친구들을 떠나고 낯선 곳의 전학은 내가 몸소 느꼈던 첫 번째 가난이었다. 학비가 감당이 안되었다. 그걸 줄여야 우리는 아파트의 월세를 내면서 살 수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를 전학시켜야 했다. 싸움이 잦아졌고, 나는 첫째라는 이유로 가정의 재정적 부담을 함께 부담했어야 했다. 그때가 초등학교 5학년, 12살이 되던 해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그 해, 아버지는 돈을 좀 버셨다. 어머니는 그 돈을 받고 가장 첫 번째로 한 일이 나를 다시 국제학교로 전학시키셨다. 어머님이 나를 전학 보내신 거에 대해 스스로 많이 죄책감을 느꼈다고 나중에 알았지만, 그때의 나는 어린 마음에 이 모든 게 일시적이고 우리는 다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마냥 기뻤다. 심지어 그해는 우리 가족이 홍콩 디즈니랜드를 가기로 말이 나왔고, 실제로 어머니는 그 계획을 위해 몇 날밤을 새셨다. 결국 못 갔지만, 그때는 정말 상황이 괜찮은 줄 알았다.



지반이 흔들렸다는 건, 정말 감출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다는 것.


  어머니는 약 3년 간 알지 못하는 고통으로 엄청 고생하셨다. 오른쪽 다리가 점점 검은색으로 변해갔고, 주기적으로 견뎌왔던 고통들이 일상이 되던 어느 날, 우리는 몇 년 만에 한국으로 갈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아버지의 회사가 망하기 직전에 벌었던 돈은, 어쩌면 엄마가 지금까지 살아있게 만들어준 돈이었을지도 모른다. 한국으로 오고 어머니는 곧바로 병원으로 가셨고, 희귀 암인 근육암(육종암) 판단을 받으셨다. 몇 안 되는 기억 중에 아직도 기억나는 건, 다리가 너무 아프셨는지 침을 잘 놓던 중국 한의사를 함께 찾아갔고 한의사한테 중국어로 엄마의 말을 통역해주던 적이 있었다. 그날 날씨가 정말 좋다. 근데 내 하늘은 그때 무너졌다. 한의사가 말하길, "이건 여기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더 큰 병원에 가봐야 한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그곳에 나오면서 엄청 울었고, 엄마는 괜찮다며 울면서 나를 위로해주셨다. 지금 생각해도 엄마는 참 강한 사람이다. 다시 하던 이야기로 돌아와 한국에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와 여동생은 아버지랑 먼저 중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곧 개학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그때 한 학기를 집에서 지냈다. 동생은 냈던 학비가 있어서 계속 다닐 수 있었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집도 이사를 했다. 40평대 내 방이 있던 집에서 주방 인덕션도 없던 원룸으로 3명이서 같이 살았다. 나에게 그 6개월은 생지옥이었다. 가난을 온몸으로 느낀 시기였다. 너무 불안했다. 살면서 처음으로 엄마랑 그리고 친구들이랑 멀리 보냈던 시절이었다. 나름의 좋은 추억도 있었다. 작은 아빠도 마침 중국 분과 결혼하시고 하문으로 이사 오셨는 데, 우리를 즐겁게 해 주기 위해 아빠랑 함께 해산물 요리도 해주고 맛있는 것들도 해줬다. 하지만 나는 왜 그 6개월의 기억을 떠올리면 눈물만 나는지...



  아버지의 사업이 망하고, 동생이 학기를 마무리할 무렵에 우리는 모든 걸 정리해서 마지막 비행을 했다. 6개월 간 생지옥을 경험했으니, 차라리 엄마가 있는 한국으로 가고 싶었다. 적어도 거기는 안전할 줄 알았다. 하지만 불행인 건, 또 다른 지옥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7년 전, 나는 엄마를 아프게 한 아버지의 딸이라는 죄명으로 한국으로 이사 왔을 때 온갖 멸시와 무시를 당했었다.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지만 지금 생각해도 조부모님과 이모부는 참 밉다. 나는 그해 겨우 14살이었다. 한국으로 이사 오고 우리는 외조부모님의 집에서 살았다. 단칸방 하나에 가족 4명이서 살았다. 나와 내 동생들 그리고 엄마는 공부도 밥도 방 안에서 먹어야 했고, 아버지는 심지어 돈을 벌기 위해 지인의 돼지 농장에서 일을 해야 했다. 2014년 1월 26일, 나는 아직도 그날을 기억하고 있다. 내가 한국으로 이사오던 날이자 끝없는 가난과 그 과정에서 느끼는 절망감들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던 그날, 살기 정말 싫었다. 아픈 엄마와 이제 막 5살, 10살이었던 동생들, 빚을 갚기 위해서 떠난 아버지, 그리고 첫째라는 이유로 모든 눈칫밥을 먹어야 했던 14살의 나... 그렇게 약 1년간 나는 단칸방에서 살았다. 그때 당시 유일한 수입은 어머니의 암 보험금이었고, 학교를 가기 위해서 나는 중학교 교복을 물려받아야만 했다. 막내는 원래 중국에 살았을 때 어린이집에 가야 했던 나이인데 돈이 없어서 못 보낸 상황이라 한국 와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았다. 둘째는 그 어린 나이에 동갑인 사촌이랑 같이 초등학교를 다녔지만, 사촌의 부모님은 공무원 집안이었다. 은근한 무시는 멀리 지켜만 보던 나도 느꼈다.


  14살, 너무 커서 맞지도 않은 교복을 입으며 등교했던 나는 적어도 학교를 다니면 친구를 만들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학교에서도 나는 겉도는 학생이었다. 휴대폰이 없어 늘 공지를 제일 늦게 알았고, 중국에서 왔다는 이유로 늘 무시를 당했었다. 심지어 내가 영어 본문을 읽을 때는 혀를 일부러 굴린다며 뒤에서 수군댔던 소리들과 돈이 없어 친구들과 약속을 잡지 못했던 나는, 소위 좀 "노는 친구, 가족의 보호를 받지 못한 친구들"과 함께 보내기도 했었고 심지어 동아리를 핑계로 밥을 혼자 먹었던 시간들도 있었다. 그때 유일한 낙은 피시방에 가는 거였다. 당시 피시방 이용 가격이 매우 저렴해서 천 원 오천 원으로 몇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 있다. 하는 게임은 없었지만, 오로지 나만의 공간이 생겨서 너무 좋았다. 그렇게 나는 1년을 버텼고, 그다음 해 2층에 살았던 이모네는 아파트로 이사를 가서 나는 다시 내 방이 생겼다. 비록 여동생이랑 같이 쓰는 방이지만, 단칸방에서 4명이서 같이 잤기 때문에 그마저도 너무 좋았다. 2층으로 이사를 온 후, 나는 좋은 친구들과 담임 선생님을 만나 무사히 중학교 3학년을 잘 마무리했다. 지금도 이 친구들과 선생님에게 정말 고맙다.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있을 수 있었다. 정말로.



가난이 미웠던 또 다른 이유, 꿈을 돈 때문에 포기해야 했을 때


  고등학생이 되던 해, 나는 새 교복을 맞췄다. 물려받은 교복을 입고 다니던 게 신경 쓰였는지 한벌 맞춰주셨다. 그렇게 고등학교 1~2학년은 크고 작은 일들이 있었지만, 담임 선생님이나 친구랑 안 맞았던 문제들일뿐 생각보다 돈 문제는 크게 없었다. 학원을 다니고 싶었지만 형편이 안되었기에 나는 그걸로 어머니의 마음을 후벼 파 왔고, 공부를 못한 건 남들이 다 다니는 학원을 보내주기 않아서라며 스스로 자기 합리화를 했었다. 그렇다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 나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온라인 세상으로 도피했다. 너무 죽을 것 같았다. 나랑 같이 국제학교 다녔던 친구들은 12년 특혜로 명문대를 진학할 예정이었고, 나는 대학교도 갈 수 있을까 말까 했던 상황이었으니까... 그래서 인터넷 방송을 했었다. 익명의 누군가에게 살려달라고 구조 신호를 보내왔던 것 같다. 그리고 실제로 나는 이 경험 덕분에 나중에 정말 큰 덕을 봤다. 일 년 동안 나는 방송 6~7 시간 씩 하면서 현실을 도피해왔다. 야자를 안 빼주던 담임 때문에 나는 밤늦게까지 방송을 했고, 학교에서는 부족한 잠을 채웠었다. 선생님들 눈에는 당연히 거슬리는 학생이었겠지만, 나는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당장 누군가에게 말을 걸지 않으면 죽어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다, 나는 기나긴 우울증을 겪어온 것이다. 당시 인터넷 방송을 했던 장비는 할부를 통해 구입한 인텔 코어 i3 노트북이었다. 게임도 안 돌아가는 정말 문서작업 용 노트북, 나는 지지직 소리 나는 유선 이어폰과 OBS만 겨우 돌아가는 노트북으로 몇 개월을 방송해왔다. 그렇게 조금씩 돈도 벌기 시작했고, 나의 방송을 위해 블루 예티 마이크와 방송용 데스크톱 풀세트를 지원해주는 시청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방송 규모가 크지 않았다. 많은 날에는 10~15명 정도? 캠이 메인인 방송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의 진심이 조금 통했는지 사람들이 나를 도와주기 시작했다. 그 해 방송으로 1년에 약 200만 원을 벌었다. 학생에게는 정말 큰돈이다. 나는 그렇게 처음으로 부업으로 돈을 벌게 되었다. 이 경험은 약 2년 후 나에게 2000만 원을 안겨준 정말 중요한 경험이 된다.


  고등학교 3학년, 성적은 정말 바닥을 쳤고 대학교 진학을 아예 포기했을 때쯤, 간호학과 2곳과 중국어 학과 1곳을 지원했고 결론만 말하면 세 곳 다 합격했다. 그중에 2곳은 면접을 봤는데, 나도 모르게 1년간 방송을 진행하면서 갑작스러운 질문을 잘 대처하는 임기응변 능력과 순발력, 그리고 자연스럽게 방송하면서 늘게 된 발성과 발음은 아주 크게 도움이 되었다. 우울증이라는 늪에서 나를 건져내 준 인터넷 방송이 나에게 새로운 길을 안내해준 것이다.


코로나 시대가 시작했고, 나는 돈을 정말 열심히 벌었다.

  20살, 코로나19가 시작되었다. 당시 우리 학교는 전면 비대면으로 수업이 진행되었다. 원하는 학과에 왔던 게 아니라서 대학교에 로망이 없었던 터라 오히려 좋았다. 주 6일이나 일했다. 당시 투잡을 뛰면서 돈을 벌었고 물론 처음에는 다 소비에 사용했다. 월 3만 원 받던 고등학생은 이제 일을 많이 하는 달에는 100만 원도 벌었으니 그게 얼마나 커 보이고 쓰고 싶었는지, 주에 3~4회는 배달을 시켰고 사고 싶은 걸 다 샀다. 그중에서 지금까지 남은 건 아이패드 프로 한대지만... 그때는 남들이 다 먹는다는 치킨부터 시작해서 모두 시켰고, 동생들은 내 덕에 원 없이 배달 음식을 먹었다. 하지만 아이패드를 사기 위해 160만 원이라는 거액의 돈을 어머니에게 빌렸고, 그걸 갚기 위해서 아르바이트하는 곳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어도 참아야 했었다. 그때 처음, 저축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마침 하나은행에서 5%짜리 특판 적금을 개설할 수 있길래 개설을 했고, 그 돈을 넣기 위해서 아이패드 돈은 다 갚았지만 몇 개월 더 일했다. 결국 일을 둘 다 한 번에 그만두게 되었지만, 정말 살면서 도움이 된 경험이었다.


  그 후로 약 7개월 간 집에서 쉬면서 나는 인터넷 방송과 부업으로 블로그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사실 블로그는 수능이 끝난 19살 겨울 방학 때 운영해봤었다. 당시 할 게 없었던 나는 중국 드라마를 엄청 봤고, 본 드라마를 다 정리하기 위해서 블로그를 운영했다. 네이버 블로그와 티스토리 블로그를 함께 운영했었는데 많이 들어온 달에는 월 방문자수가 3만 명이 조금 안됐었다. 당시 나는 애드센스를 아버지 도움으로 달게 되었고 수익이 조금씩 났던 경험이 있어서 알바 그만두고 쉬던 기간 동안 부업으로 블로그를 했었다. 방송한 시간에 비해 돈을 못 벌어서 과감하게 포기를 하고 학교에서 근로장학생을 모집한다고 하길래 바로 신청했다. 당시 아르바이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 있었고, 실제로 선정돼서 교내에서 일했을 때도 비교적 편하게 일했다. 그렇게 나는 학교 수업을 들으면서 근장 일을 했고 집에 오면 블로그를 운영해왔다. 그리고 중국어도 활용해서 자막 번역 외주랑 공장 컨택 번역 일을 받아냈고, 일을 했던 경험이 있다.


  인터넷 방송, 애드포스트/애드센스 정산, 쿠팡 파트너스, 중국어 번역 외주, 스마트 스토어 운영까지 정말 다양한 일을 해왔고 그 덕분에 나는 일을 하면서 21살에 2000만 원을 달성할 수 있었다. 물론 극단적으로 돈을 아꼈던 것도 있지만, 당시 나는 중국 유학을 너무 가고 싶었고 찾아보니 장학 프로그램이 있길래 딱 초기 정착 비용 500만 원만 모으자!라는 생각을 했었다. 벌었던 돈의 70~80%를 저축하면서 소소하게 투자도 했고, 지금은 과소비와 거리가 멀어진 짠돌이 대학생이다.




21살에 2000만 원을 벌게 해 준 힘

  내가 모은 2000만 원에는 분명히 가족의 도움이 있었다. 본가에 거주하며 매월 소액이지만 용돈을 받고 있고, 밥을 집에서 먹고 대학교 학비를 집에서 지원해주니까 모을 수 있었던 돈들이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같은 기회가 오더라도 결국 나만큼 못 모은 사람들은 분명히 있을 거다. 나는 실제로 가난을 직접 경험했고, 지금도 그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다. 하루에 쉴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없다. 집 오면 새로운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새로운 블로그 글을 포스팅하고 사람들을 모아서 정보를 공유하면서 살고 있다. 처음에는 원하는 학과를 가지 못한 설움이 내가 독하게 500만 원을 모을 수 있게 해 주었고, 모아진 500만 원을 보니 자연스럽게 1000만 원을 꿈꾸게 만들어줬다. 돈을 정말로 없을 때는 쉽게 쓰지만, 조금씩 모이는 게 보이면 그렇게 쓰는 게 아깝더라. 그렇게 독하게 모았고, 앞으로도 당분간 독하게 살아갈 생각이다. 비록 코로나 19 때문에 미뤄졌지만 나는 아직도 품속에 중국 유학의 꿈을 품고 있고 내 명의로 된 자가를 꿈꾸고 있고, 고생한 만큼 보상받으면서 사는 노후 생활을 꿈꾸고 있다.


  7년이 지난 지금, 비록 어머니는 폐암 수술을 앞두고 있고 아버지는 여전히 빚을 갚으시느라 우리와 함께 살지 못하고 있지만 모두가 긍정적이고 여유로워졌다. 폐로 암이 전이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너무 불안했지만 곧바로 정신을 차리게 되었고, 마침 만기 되는 적금이 있어서 50만 원이 들어있는 돈 봉투를 어머니에게 건넸다. 거의 한 달 월급과 맞먹은 이 돈을 건넬 수 있다는 건, 나에게 정말 엄청난 성취감이다. 단 돈 10만 원이 통장에 없던 시절이 불과 2년 전이였고, 2년이 지난 지금 어머니의 수술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다는 그 사실에 너무 감사하고 나 자신이 대견스럽다.


  이 글을 적게 된 이유는, 나와 비슷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에게 숨죽여 울 수 있는 시간을 건네주고 싶었다. 고생했다는 말보다 나 같은 사람이 이 세상에 더 있다는 걸 알기만 해도 엄청난 위로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내가 다른 사람들의 책을 읽고 엉엉 울었던 그날들처럼, 누군가에게 힘내 대신 이 글을 건네주고 싶다. 우리는 이겨낼 수 있다. 그렇니 악착같이 버티고 나를 위해서 돈을 벌자. 우리는 할 수 있다. 당장이라도 시작하면 정말 뭐라도 남는다. 2년 전 19살의 내가 취미 생활로 시작했던 인터넷 방송이라는 작은 날갯짓이, 지금 나의 2000만 원을 만들게 해 주었다. 나비효과를 믿고, 지금 당장 뭐라도 시작하자. 우리 끝까지 살아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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