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
10대 때는 뉴스를 읽지 않았고, 20대에는 흥미 위주의 뉴스를 접했다. 주로 과학, 문화, 예술 뉴스 그리고 사회적으로 파장이 큰 문제를 주제로 다양한 시선을 정리해서 한 번에 요약해둔 주간지를 주로 봤던 것 같다. 삶은 순탄하게 흘러갔고 국내외 정세를 안다고 해서 큰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눈에 걸리는 뉴스를 기분 내킬 때마다 보며 무감하게 살았다. 주된 관심사는 학업과 연애 정도에 그쳤고 말이다. 결혼을 하고 30대에 들어서면서 경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알랭 드 보통이 '뉴스의 시대'에서 표현한 ‘경제지표는 삶을 의미 있다거나 희망차다고 느끼고자 우리가 흔히 기대는 척도에 대한 감각을 끊어버릴 수 있다.’문장처럼 나 역시 거대한 경제의 규모를 접하게 되면서 나의 삶이 보잘것없다는 생각을 종종 했던 것 같다. 다만 20대의 무감함이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30대의 무신경함은 단기에 요동치는 국내외 시장보다는 장기적인 흐름을 보게 되면서 만들어진 것이라 과거와는 조금 다른 생각으로 접근하게 되었던 것 같다. 좀 더 괜찮은 사회면 좋겠다는 생각과 나도 괜찮게 살고 싶다는 욕망이 상충하는 삶 중간에 경제 뉴스가 자리 잡았다.
경제 뉴스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법적 규제로 옮아가면서 정치 뉴스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기존에 즐겨보던 과학, 문화 뉴스와는 결이 다른 지저분하고 단발적인 기사들로 뒤덮여있었지만 찾아서 봐야 했던 뉴스와는 다르게 의지와 관계없이 수천 개씩 쏟아지는 경제, 정치, 국제 뉴스에 휩싸이게 되었던 것 같다. 사실을 보여주고 있지만 진실은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맥락이 거세된 뉴스를 보며 30대를 보냈고, 40대가 된 지금은 평생 살아온 것보다 더 많은 뉴스를 보며 살지만 과거 어떤 시절보다 미디어를 믿지 않는다.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 뉴스의 방식을 불신하고 내가 생각할 때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방향 - 내가 믿고 따르는 나의 편향 -으로 뉴스를 조합하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애쓰고 있다. 언론사로부터 돈을 받는 것은 내가 아닌데 말이다. 어쩌겠는가.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필요한 사람이 자료를 모아 훑어보고 생각하고 삶의 방향타를 조정하는 수밖에. 좀 더 괜찮은 뉴스를 생산하는 언론사를 주로 살펴보되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으면서 말이다.
뉴스의 기저에 깔려있는 정치적 경제적 의도성을 의심하며 삶에 도움이 되는 뉴스를 찾아보는 일이 당연한 일상이 되었음에도 알랭 드 보통의 ‘뉴스의 시대’가 보여주는 뉴스의 세계는 혐오스러웠다. 살상이나 사고 같은 사건을 집요할 정도로 보여주면서 하나의 구경거리로 전락시켜버리는 뉴스의 성향은 저열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종교에서 시작되었다는 뉴스의 이야기가 결국엔 종교처럼 이기적이고 배타적이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어서 책장을 넘기는 것이 고된 일이었다. 뉴스를 믿지 않으면서도 왜 믿지 않게 되었는지를 적확하게 설명할 수 없었지만 20년을 돌아 은연중에 알게 된 뉴스의 본질을 칼로 저며내듯 하나하나 보여주는 문장들이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도 끝까지 읽었고 결론 부분에서 보람마저 찾을 수 있었다.
커다란 사건과 피칠갑을 한 사람들의 사진을 동반한 사실이 뉴스로서 내게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볼 수 있게 되었다. 뉴스를 바라보되 나의 기준을 잡아야 한다는 이야기, 분명한 타자인 뉴스 제공자들의 속보나 단독기사보다 나의 삶에 더 도움이 되고 필요한 것들을 어떻게 찾고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다정하거나 친절한 감정을 바탕으로 좀 더 나은 삶과 사회를 위해 우리는 뉴스를 함부로 소비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기에 뉴스에 흔들리지 않고 주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나의 시선을 믿으며 ‘나는 왜 이 뉴스를 보고 있는 것일까?’라는 평범한 질문과 함께 오늘도 신문을 펼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