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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홈은 Jul 14. 2022

제임스 볼의 '개소리는 어떻게 세상을 정복했는가'

지나고 보니 개소리

어떤 내용이 사실은 개소리였다는 것을 언제 알아차릴 수 있을까? 적당한 사실과 거짓이 뒤섞인 두 개의 기사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서로 반대의 관점에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둘 다 읽는 사람의 편향이나 관심에 따라 믿는 내용은 달라질 것이다. 시간이 한참 흐른 후 어떤 관점이 개소리였는지 알게 될 수도 있고 관심도가 낮아져 진실 여부에 큰 신경을 쓰지 않고 내가 믿었던 관점이 개소리였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믿고 따르는 것이 개소리가 아니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지인을 통한 정보 공유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서 돌아다니는 내용을 이야기하며 신문보다 더 믿을 수 있는 자료들이라고 말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내 취향에 맞춰 선택한 사람들이 올린 피드가 모두 사건의 맥락을 담은 올바른 내용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정보를 공유한 사람에 대한 신뢰를 정보에 대한 신뢰와 동일시해도 괜찮은 것일까? 출처가 불분명한 이야기일지라도 친구가 리트윗 했다면 그 정보는 믿을 수 있는 정보일까? 


전문가 집단보다 믿을 수 있는 유튜버

2020년 1월 20일이었던가. 첫 코로나19 환자가 발생한 이후로 코로나19와 코로나19 백신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들이 유튜브에 떠돌았다고 한다. 아주 많은 정보를 습득하고 있어서 코로나19 백신에 대해 전문가만큼 알고 있다고 말한 사람은 정부에서 발표하는 내용을 전혀 믿지 못한다고 말했다. 코로나19로 부터 안전할 방법은 신뢰할 수 있는 친인척을 포함한 가족들과의 만남만 지속하는 것이고, 코로나19 백신의 부작용은 정부의 음모론으로 가려져 있으며 과학저널 역시 정부의 압력에 잘못된 내용의 논문을 제공하고 있다고 했다. 몇몇 용기 있는 유튜버들이 정부의 음모에 맞서 시민들을 백신의 위험에서 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수치화된 모든 데이터의 오염을 주장하며 아무것도 믿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유튜버는 믿을 수 있었을까? 믿음의 토대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읽고 싶다고 말하는 정보와 실제로 읽는 정보의 간극

사회 발전에 도움을 주는 양질의 기사를 보고 싶다고 말하지만 포털에서 상위 랭크를 차지하는 기사들은 자극적인 내용의 맥락 없는 기사들인 경우가 많다. 기자를 기레기라고 폄하하면서도 불편한 진실을 담은 기사보다는 사회를 보는 눈을 가려버리는 기사들을 클릭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비록 사실일지라도

세금을 내는 국민의 입장에서는 세금을 횡령하는 공무원의 기사나 세금을 낭비하는 인상을 주는 기사를 보면 세금이 아깝다고 느껴진다. 그리고 세금을 무조건 줄여주는 정책이 국민을 생각하는 좋은 정책이라고 믿고 싶어 진다. 길바닥의 보도블록 하나조차도 모두 세금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자세하게 설명하는 기사는 있을까? 세금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 되는지 예측하는 기사조차 없이 세금 사용의 문제점만 잔뜩 나열한 기사들만 볼 수 있다면 사람들은 세금에 대해 어떤 편견을 갖게 될까? 


단톡방의 요약본

불법임에도 불구하고 공공연하게 떠돌아다닌다. 익명의 편집자가 작성한 요약본에는 다양한 언론사의 기사들이 섞여있어서 얼핏 보면 객관적 자료들만 모아서 엮은 것처럼 느껴지지만 자세히 보면 특정 기업을 찬양하거나 어떤 정책을 지지 또는 반대하는 내용의 기사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단순한 주장보다 설득력을 지니기 때문에 또 다른 단톡방으로 쉽게 옮겨진다. 자료 하나하나에 집중하느라 묶음 자료가 내포하는 의미에 대해서는 알아차리기 어렵다. 


불확실성이 큰 시대를 살아가며

내가 믿고 따르는 것이 바르지 못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자.

자료의 출처를 신경 쓰자. 신뢰할 수 있는 자료인지를 파악한 후 재공유 하자.

백분율, 그래프 축 등으로 교묘하게 사실을 가리는 통계 속임수를 파악하자.

'정치인과 미디어에 책임 있는 모습을 요구하며'(359쪽) 진실을 호도하는 음모론에 넘어가지 말자.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고 싶다고 아름다운 거짓을 진실인 양 받아들이진 말자.

무딘 눈에 보이는 사회의 모습과 평균이라는 지표에 가려진 미세한 영역의 사회는 판이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잊지 말자.


개소리

어쩌다 개 짖는 소리가 헛소리의 다른 표현이 되었을까.
세상을 왜곡하는 인간의 소리보다 더 진실할 텐데 말이다.
개가 불쌍해.


제임스 볼 / 김선영 옮김 / 다산초당 /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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