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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쏘 Nov 04. 2021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비채, 2016.08.19.


'문장이 주는 희열'을 아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 책을 좋아할 거라서, 이 책을 즐겁게 읽은 사람과 대화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책. 책장에 꽂아둔 표지만 보아도 여름 새벽 물안개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장작을 너무 붙이면 안 타. 너무 떼어놔도 안 타고. 약간 떨어져 있는 게... 봐, 이게 가장 잘 타는 간격이야." -41쪽


아침, 점심, 저녁식사와 3시의 티타임에 동석할 때 외에는 마리코는 직원들과 떨어져서 일한다. 가사 업무가 끝나면, 마지막으로 우편물을 부치러 간다. 마리코의 르노5 엔진 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는 도면에서 얼굴을 들어 계수나무 잎사귀 초록 너머로 작고 까만 차체가 가로질러 가는 모습을 배웅했다. -46쪽


목소리란 참 이상하다. 목적도 마음도 그대로 드러난다. 유키코의 온갖 것이 목소리에 깃들어 있는 것 같고 그 모든 것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그 목소리는 사람을 잘 설득한다. 귀에 쉽게 들어오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하나도 없는데, 그래도 여전히 설명으로는 다 할 수 없는 부분이 조금 남는다. 그 조금 남아 있는 것이 사람을 매료시킨다. 말의 의미 그 자체보다도 소리로서의 목소리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게 아닌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지, 유키코의 목소리가 들리면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유키코의 목소리를 모아두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유키코는 선생님한테도 각각의 사원들한테도 신뢰받았다. 온화하고 정확한 일처리가 그 목소리에 묻어났다. 그러니까 나는 유키코를 눈으로 좇지 않았다. 다만 귀는 유키코의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향했다. - 62쪽


짧아진 연필은 리라 홀더를 끼워 쓴다. 길이가 2센티미터 이하가 되면 매실주를 담는 큰 유리병에 넣어서 여생을 보내게 하는데, 병이 가득 차면 여름 별장으로 옮긴다. 쓸 일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난로 곁 선반에는 연필로 꽉 찬 유리병이 일곱 개나 늘어서 있다. 

연필 깎는 소리로 하루가 시작되는 것은 기타아오야마나 여름 별장이나 같았다. 시작해보니 분명히 그것은 아침에 제일 먼저 하는 작업으로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를 끓이는 향내처럼, 연필을 깎는 냄새에 아직 어딘가 멍한 머리 심지가 천천히 눈을 뜬다. 사각사각 하는 소리에 귀의 신경도 전원이 켜진다. - 63쪽


잘 닦인 유리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가면, 천장에는 낙엽송이, 바닥에는 노송나무가 가지런히 발라져 있고, 나무무늬가 예배당 가운데로 흐르고 있다. 노송나무 원목의 나뭇결은 석회와 찰흙과 풀가사리를 반죽한 하얀 회반죽벽 사이에 조용한 긴장감을 자아냈고 그 표면에 닿는 공기를 정화하는 것 같았다. 들어가서 바로 있는 로비를 곧장 빠져나가 막다른 예배당 문을 열자 강단이 있는 정면으로 내리막 경사가 뻗어 있다. 진입로에서 로비, 예배당으로 이어지는 흐름에는 심리적 벽이 없었고, 고양이 배처럼 부드럽고 매끄러웠다. 선생님의 건축이 늘 그렇듯이 무언으로 사람을 받아들이는 친근한 공기가 떠돌았다. -71쪽


"손이 닿는 부분은 현관 손잡이 빼고는 나무가 좋아." 선생님이 말씀하신다. "현관문은 안과 밖의 경계선이니까 금속을 쥐는 긴장감이 있는 편이 좋지. 밖에 있는 문손잡이가 나무로 되어 있으면 실내가 밖으로 삐져나온 것 같아서 뭔가 쑥스러워." -145쪽


미끄러지듯이 움직이는 우치다 씨의 손을 보고 있어도, 어디에 어떻게 힘을 넣는지 알 수 없다. 팽팽하게 긴장된 선, 가볍고, 딱딱하고, 부드럽고, 아무하고도 비슷하지 않은 소리가 난다. 

"선을 그을 때 무의식적으로 숨을 멈추잖아? 그게 잘못된 거야. 누구나가 빠지기 쉬운 착각이지." 연필을 손가락에 쥔 채 미덥지 못한 얼굴을 한 나한테 우치다 씨가 말했다. "숨을 멈춘 순간 근육은 단단하게 긴장하지. 천천히 숨을 내쉬면 근육에서 힘이 빠져. 심호흡을 하면 릴랙스한다는 것은 그런 얘기야. 그러니까 천천히, 힘주지 말고 숨을 쉬면서 선을 긋는 편이 팔 상태가 안정된다고." -146쪽


"그렇게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는 것은 건축이 잘됐다는 이야기야." (...)

"나눗셈의 나머지 같은 것이 없으면 건축은 재미가 없지. 사람을 매료시키거나 기억에 남는 것은 본래적이지 않은 부분일 경우가 많거든. 그 나눗셈의 나머지는 계산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야. 완성되고 나서 한참 지나야 알 수 있지." -180쪽


다시 생각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다. 후지사와 씨는 사람과 떨어진 삶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나날을 보낼 수 있는 강인함을 어떻게 익혔을까. -275쪽 


사무소 존속에 대해서는 자네가 생각하던 방법도 포함해서 다른 방법이 있었을지 몰라. 그러나 억지로 계속하려고 해도 아마 도중에 숨이 차버릴 거야. 그것이 이것저것 생각해본 나의 마지막 결론이었어.

덕분에 지금까지 오랫동안 좋은 일을 할 수 있었어. 감사하고 있네. 자네가 없었더라면 이렇게 하고 싶은 대로 일하지 못했을 거야. 다시 한 번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네. 

나는 쭉 좋은 직원들을 만났고 그 힘으로 지탱해왔어. 직원 모두에게 편지를 쓰고 싶지만, 이 편지를 읽을 때 누가 사무소에 남아있을지 몰라서 자네에게 대표로 감사 인사를 하고 싶네.

신세가 많았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무소 해산 수순에 힘써주기를. 정말 죄송하지만 잘 부탁합니다. 사무소 여러분께서는 나의 이 판단을 부디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일은 사무소 안에는 없고, 여러분 손안에 있습니다.

부디 좋은 건축 일을 계속 해주길 바랍니다. 

1982년 7월 28일, 무라이 슌스케 

-4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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