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하는 사회에 대하여

by 이호빈

지나온 날들의 과오가 선연하여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일상을 흘려보내던 시기가 있다. 죄책의 무게를 견디다 버거워질 때쯤 무흠결한 도덕성을 갖춘다는 것은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에게 허락된 영역이 아니라는 합리화로 지난날의 모지람을 애써 외면했다. 그러나 유명인들의 과거가 파헤쳐지고 특정 순간의 잘못이 다시 소환되어 비판의 중심에 놓이는 모습을 볼 때면 다시금 긴장하곤 했다. 당사자가 잘못을 저질렀던 시기로의 회귀를 경계하며 반성의 삶을 살았는지에 대한 질문 없이 파묘 후 생긴 구덩이에 당사자를 묻고 있는 대중을 보고 있으면, 무흠결한 도덕성을 갖추는 일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용서, 긍휼, 이해 같은 요소들은 더 이상 현실에서 찾아보기 어렵다는 사실에 마냥 서글퍼진다.


많은 순간 우리는 용서하는 일에 각박하고, 수용하는 일에 너그럽다. 타인의 잘못을 마음속에 각인한 후 타인의 불행을 기원하는 마음과 자신의 잘못을 용인하고 자신의 행복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모습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우리라는 표현은 과도한 일반화라며, 자신의 특수성 및 차별성을 주장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비범함이 평범함의 부재를 뜻하지 않듯 우리의 본성은 자신의 안위를 최우선하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순 없다. 우리는 지독하게 무흠결한 도덕성을 요구하고 외면한다.


무흠결한 도덕성을 흠모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더 좋은 사회를 일궈 후대에게 넘겨주겠다는 마음인 걸까 그렇다면 무흠결한 도덕성을 외면하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자신의 안락함이 보장되는 사회를 꿈꾸는 것일까? 결국 무엇이 후대가 살아가기에 좋은 사회를 만드는 밑거름이 될까?


이따금 나이를 지긋히 먹은 미래의 나의 모습을 상상하곤 한다. 한적한 시골 동네에 위치한 집 마당에서 햇볕을 쬐며 흔들의자에 앉아 있는 나. 삶의 마지막을 준비하며 손주 사진을 보는 즐거움으로 살아가는 나. 상상을 계속 이어가다 보면 손주들이 살아갈 세상은 보다 따뜻하길 바라는 마음이 자연스레 커진다. 커진 마음은 후대에게 무엇을 남겨줄지, 어떤 국가, 어떤 사회를 일궈야 후대에게 떳떳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 고민의 결론은 늘 두리뭉실하다. 서로를 따듯하게 대하는 사회여야 하지 않을까? 결론보단 과정을 조명해 주는 사회여야 하지 않을까? 의도를 경청하고 태도를 개선하는 개인이 많아져야 하지 않을까 등 고민이 고민을 낳고 확신의 결론 내리기는 늘 다음으로 미뤄둔다.


나이를 먹고 삶을 살아갈수록 무언가를 확신하는 일에 점점 더 주저하게 된다. 인생의 많은 논제들은 회색지대의 속한 문제일 때가 많고, 무엇이 옳은가에 대한 기준은 맥락에 좌우될 때가 많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게 되기 때문이다. 몽매한 확신 보단 지혜로운 모호함이 살아가는 일에 그리고 사랑하는 일에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물론 치열한 사고 끝내 내린 확신 역시 살아가는 일과 사랑하는 일에 필수적이다. 일의 목적성이 옳다고 판단되면 목숨을 걸어야 되는 때가 있다. 자랑스러운 독립운동가, 불 속을 과감히 뛰어드는 소방관 등이 보여주는 확신의 가치는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등대처럼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알려준다.


나는 무흠결한 도덕성을 강요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세상에 유해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후대가 살아갈 사회에 무흠결한 도덕성을 강요하는 세태는 없어야 마땅하다고 확신한다. 나는 우리가 이를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고 단언한다. 삶을 살아가면서 사람을 사랑할 때 무흠결한 도덕성을 기준으로 사랑받을 자격을 부여하는 태도는 자신에게나 이웃에게나 후대에게나 한없이 가혹할 뿐이다. 후대가 살아갈 사회에는, 사람의 결함을 단죄의 근거로 삼는 문화가 아닌, 맥락을 살피고 회복을 허용하는 시선이 자리해야 한다. 우리가 해야 할 노력은 완전무결한 기준을 서로에게 들이대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불완전함을 전제한 채 어떻게 함께 나아갈 것인지 고민하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