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내일 시간 되면 다 같이 덕수궁 미술관(정식 명칭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으로 장욱진 전시회 보러 가자.”
전시 일정이 길어 관람에 여유가 있다고 생각했던 게 결국 마지막까지 오게 했다.
서둘러 미리 해 놓지 않고 있다 보면, 놓치고 아쉬워하거나 이렇게 마지막에 마음이 급하게 무엇을 하게 될 때가 많다. 그러고 나서 또 반복하는 이 행동의 패턴은 참 보편적이어서 대화에서 쉽게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받고 서로의 한탄을 공유하게도 한다.
아무튼 아들 딸 대동하고 아내와 설 명절 마지막 날 덕수궁을 찾아간다.
날이 날이니만큼 사람이 많다.
고궁 나들이를 온 사람도 많고 미술관 관람객들은 더 많게 느껴진다. 전시실 입구부터 줄이 길다.
그나마 명절 연휴라서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 작은 위안을 준다.
보고 느끼는 바가 다 다르겠지만 장욱진의 그림을 볼 때 내가 느끼는 감정은 소박함에서 오는 편안함이다.
“참된 것을 위해 뼈를 깎는 듯한 소모”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자유로운 발상과 방법으로 화가로서의 본분을 지키며 자기 자신을 소모시켰다. “나는 정직하게 살아왔노라.”라고 당당하게 외치며 ‘진솔한 자기 고백’으로 창작에 전념했다.
방바닥에 쪼그려 앉아 뼈를 깎는 소모까지 마다하지 않은 작가의 작업에 힘입어 나는 자유로움과 편안함을 느끼고, 내 노력으로 찾지 않은 순수함에 도달한다. 그림을 보며 작가에게 감사하는 이유다.
치열함은 시대를 넘어서서 항상 젊음을 보여주는가 보다.
마커를 사용해 그린 그림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 모던한 세련됨이 요즘 작가의 작품이라고 해도 별 이상함을 느끼지 않을, 시간을 넘는 현재성을 보여준다.
그림의 원작 앞에서 프린트된 작품으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었던 감동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오르세 미술관에서 르느와르와 고흐의 작품을 보았을 때의 시각적 충격은 원작만이 줄 수 있는 큰 매력을 깊게 각인 시켜 주었는데, 이번 전시회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게 된다.
3층 전시실 앞에 비치된 ‘촉각 그림책’이 눈길을 끌었다. 작품을 보고 만지며 소통할 수 있게 하기 위해 개발된 자료인 모양인데, 점자책과 큰 글자 감상 자료는 자주 보았어도 전시회에서 이런 자료는 처음 본 지라 준비를 한 사람들의 정성과 생각이 고맙게 느껴진다. (과문한 탓에 나만 몰랐던 것일 수도)
미술 전시회에서 전시실을 모두 보는 것은 항상 힘이 든다. 더구나 관람하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3 전시실을 둘러볼 때쯤 돼서는 약간 진이 빠졌다.
여행 가서 그 큰 미술관을 다 둘러보겠다고 몸을 혹사해 가며 뛰어다니던 욕심을 생각하며, 이쯤이야 하고 힘을 내 본다.
최애 작품들 (앞은 아내 뒤는 나)
평상시에 가장 좋아하던 그림 앞에서 잠시 멈추어 서서 이게 아빠의 원픽 그림이라고 딸에게 말해 준다, 자신의 최애 작품은 아니지만 자기도 좋아한단다. 미술을 전공한 딸은 전시회에서 설명을 자주 요구하는 아빠에게 그냥 느낀 대로 아는 대로 보는 거지 무슨 설명이냐고 질색을 하면서도 가끔씩은 알지 못하는 것, 보지 못하는 것을 짚어주며 나의 시야를 넓혀주기도 한다.
장욱진, '가족',1955, 캔버스에 유채, 6.5x16.5cm.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일본에서 60년 만에 발굴되어 전시되었다는 가족그림 앞에서 모든 이들의 감정을 말랑말랑하게 만드는 보편적 가족애를 만나니, 오늘 우리 가족 네 명이 같이 전시회를 보고 있는 시간이 소중해졌다.
대한문 앞에 서있는 수문장을 지나가며 어떻게 하면 자신도 수문장을 할 수 있을까 하고 제 오빠에게 작게 물어보는 딸의 질문에 모두 어이없어하면서도 환한 웃음을 지으며 고궁을 빠져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