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우랄리부터의 길은 낙석이나 눈사태의 위험 지역을 피해 물을 건너 돌아 가게도 해서 불안해 보이는 조그만 나무다리를 건너기도 하는데, 눈이 녹아 흘러내리는 계곡물은 흐름이 상당히 거칠다. 희뿌연 격류의 물결 위로 손잡이도 없는 철제 듬성등성하거나 나무들을 엮어 놓은 다리들은 크게 위험한 것은 아니더라도 건널 때마다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다.
하지만 길 자체는 걷기에 어려움이 별로 없는 무난한 고도 상승이 이루어지는 구간이다. 단지 고소증세가 나타날까 걱정되어 최대한 천천히 걷는다.
어제저녁부터 새벽까지 내린 비로 인해 질척이는 길이 곳곳에 있다.
어제는 조금 늦게 오른 사람들이 비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한 모양이다. 몹시 내리는 비를 맞고 어두워진 후에야 도착해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히말라야 롯지에 방이 없어서 비를 맞으며 여기까지 올라오느라 늦게까지 걸어야 했던 모양이다. 이곳 롯지들도 모든 룸이 다 차게 되어서 원래 혼자 사용하도록 배정받았던 내 방에도 일행이 생겼다. 유쾌한 네팔 사람인데, 미국에서 살고 있는데 모처럼 네팔에 오게 되어서 가이드하는 친구랑 같이 ABC를 간다고 한다. 낮에 지나치면서 눈인사를 했던 기억이 있다. 말이 빨라 잘 알아듣지를 못하고 천천히 하려고 하니 몇 마디 나누기가 어렵다. 친구라는 가이드는 한국말을 쪼끔 한다며 몇 단어, 문장 몇 개를 물어본다.
계곡을 끼고 가는 길에 음지 지역을 지나가니 바람이 차다. 걷고 있는데도 서늘한 느낌에 얼른 바람막이를 입고 비니 모자에 버프까지 겨울산행 복장을 갖춘다. 조금 지나니 아이젠을 신고 내려오는 사람들이 보여, ‘아, 이제부터 겨울산행인가’하고 생각했으나 계곡을 조금 더 오르며 해가 비추는 길을 걸으니 다시 더워져 옷을 가볍게 한다.
좁은 길에서 교행을 하면서 천천히 인사를 하면서 가는데 내려오던 사람이 “한국인이세요” 하고 물어온다. 길에서 살짝 벗어나 반갑게 인사를 나눴는데 ABC에서 고소증세로 머리가 아파서 일찍 내려가는 중이라고 한다. 고산병에 대해서 경각심을 다시 갖게 된다. (고산병을 예방하려고 먹은 약이 손끝을 살짝씩 저리게 해서 불편함을 느껴서 계속 먹어야 하나 조금 생각을 했었는데 그런 고민을 할 때가 아닌가 보다 하는 생각을 한다. - 아세타졸라마이드라는 고산병약은 먹고 나면 소변을 자주 보게 되는 불편함뿐 아니라 말초 신경 부분이 살짝씩 저릿저릿함을 느끼게 하는 증상이 있어 크게는 아니지만 불편함을 조금 느끼기도 한다.)
드디어 머릿속에 그려오던 길을 걸어가게 된다. 설산들이 만들어 내는 그 거대한 장관과 어젯밤 내린 비로 쾌청해진 파란 하늘 사이를 걷는 길은 행복감으로 가득 차 있다.
웅장한 풍경 앞에 조금만 존재들이 지나가는 모습은 어디나 찍어놔도 화보가 된다.
MBC에 도착을 했다. 마차푸차레, 네팔인들의 신성한 경의를 받고도 남을 만한 엄청난 위용이다. 봉우리 끝이 갈라져 있는 것처럼 보여 물고기 꼬리 같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 피쉬테일이라고도 불리는 마차푸차레는 힌두교의 비슈누신이 현현한 두 형제라고 여겨져 신성시되고 있어 등반이 허용되지 않는 곳이라고 한다.
산봉우리가 멋있어서 세계 3대 미봉(아마다블람, 마터호른과 함께 - 이런 건 누가 정하는지 생각해 보면 좀 우스운 감이 있다. 뭐, 3대 미항, 7대 불가사의 ~)이라고 회자되기도 하는데, 계속 보고 있어도 눈이 뗄 수 없는 마성을 가지고 있다.
MBC를 지나면서의 길은 걷기도 쉽고 목적지까지 아주 가깝다. MBC까지도 굉장히 쉽게 걸어왔는데, 더 편한 길을 가니 걱정이 없다. 그래도 천천히 천천히 간다.
여기서부터는 눈을 밟고 가게 된다. 길만 따라가야 한다고 가이드가 경고를 한다. 한 발만 벗어나도 무릎을 넘어가는 눈이다. 날씨가 따뜻하여 물 웅덩이를 숨기기도 한 질척이는 눈길도 있는데 그렇다고 함부로 길을 벗어나면 위험할 수도 있다니 조심하면서 길 따라 걸어갈 뿐.
큰 설산 봉우리가 있길래 이름을 물어보니 알 수 없단다. 그럼 저것도 그냥 뒷 산인거지.
그러면서 히운출리(6441m)처럼 조금 낮은 것은 출리라는 이름이 붙는다니, 5~6000은 넘어야 이름도 생기나 보다. 그러다 알게 된 사실, 우리가 가고 있는 ABC는 히운출리 아래에 있다는 것이다(안나푸르나를 정면으로 보았을 때 왼쪽으로 안나푸르나 남봉이 있고 그 왼쪽 앞쪽으로 히운출리가 있다).ABC는 안나푸르나 아래 있을 거라는 나의 통념이 훅 무너지는 순간이다. 안나푸르나에 더 가까이 접근하는 것은 허가를 받은 전문산악인들만 가능한 모양이다.
사회제도나 문화적 관습 같은 것에서도 당연하다고 오래 생각해 왔던 것들이, 나의 시야가 얼마나 좁았는가를 반성하게 하면서 이렇게 무너지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는 살짝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하지만 나의 틀을 조금 무너뜨렸다는 기쁨이 함께 하기도 한다.
가다가 서면 풍경이고, 뒤돌아서면 사진에 담고 싶고, 걸어오는 사람들의 모습이 영상에서 자주 접하던 그런 멋진 풍경 안에 담겨 있고 길이 곧 끝날 것 같아 아쉽고 서운하다. 길이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보는 것은 트레킹을 시작하고 처음인 것 같다.
천천히 천천히 걸어도 길은 끝이 나고, ABC롯지들이 눈에 들어오고, 그 앞에 서 있는 이곳을 들른 모두의 사진 배경이 되는 안나푸르나베이스캠프 안내판에 도착한다. 이미 구름이 먼저 도착해 봉우리들은 다 가려 놓았다. 살짝 안타까운 마음이 스치기도 했지만 내일 오전에는 맑게 시야를 열어 주리라 굳게 믿고 기념사진을 찍어본다.
같이 걸어온 중국 트레커는 요가 자세로 어려운 포즈를 만들어 기념을 하는데, 이미 중간중간 멋진 장소에서 사진을 찍을 때마다 멋진 구도의 다양한 요가 자세를 선보여 왔기에 기대를 하고 보는데 역시나 멋진 브리지 자세를 선보여준다.
많은 도움을 준 가이드, 같이 고생하며 올라오면서 친해진 사람들과 사진을 찍고 나서, 가방에 달고 다니던 잊지 않겠다는 세월호 작은 노란 리본을 들고 기념사진을 찍는다. 오늘이 4월 14일. 내일모레가 세월호 10주기가 되는 날이라 평안과 영면을 기원하며 기억과 안전에 대한 다짐을 담아 본다. 안전한 세상에 대한 다짐이 날리는 타르초에 담긴 소망처럼 세상 어디 까지라도 번져가기를 기원해 본다.
짐을 풀고 숙소 바로 뒤의 전망 좋은 언덕으로 올라가니 개 한 마리가 따라오다가 포인트에 올라 멋진 자세를 잡는다. 아하, 저런 위치선정과 자세는 모르고 나올 수 있는 게 아닌데 하는 생각에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바로 아래 보이는 길게 뻗은 가파른 절벽과 그 아래 거칠고 황량한 계곡 풍경은 다른 행성을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가파른 절벽의 눈들은 별로 쌓여 있어 보이지 않았는데도 조금의 흔들림에도 주욱 사태 나듯 흘러내린다.
햇살이 좋아 몸으로는 따뜻함을 느끼니 눈으로 보고 있는 설산의 풍경과 감각적인 충돌을 가져온다.
조금 전 나에게 사진을 부탁했던 사람이 동영상 촬영을 하면서 위험해 보이는 바위 끝으로 기어오른다. 보는 내가 더 불안하고 찌릿찌릿해서 그러지 말라고 붙잡아 말려주고 싶다.
롯지의 다이닝 룸으로 들어오니 여러 팀 사람들이 즐겁게 이야기를 하는데 영어 소통이 어려운 나는 끼어들어 대화를 나누기가 어려워 심심하게 따로 앉아 오늘의 일들을 정리하는데, 걸어오는 내내 감동으로 이어졌던 길들이 벌써 기억이 흐릿해지니 참, 그 많은 것들을 기억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브라질에서 왔다는 17살 씩씩한 여성 트레커는 남들과 섞이질 않고 공책을 들고 열심히 기록을 하고 있었는데, 할아버지 한분이 손녀처럼 귀여워해 주면서 자신의 휴대폰 사진을 구경시켜 주자 자기의 여행에 대해서도 재밌게 이야기를 한다. 당찬 말투와 재기 발랄한 행동이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모두 그 나이에 혼자서 ABC까지 올라온 용기에 더 감동하고 있는 거겠지.
사람들 이야기도 흘려가며 듣고 노트 정리도 하다가 창밖을 보니 마차푸차레가 뚜렷하게 찬란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서서 감상을 하다가 혹시나 하는 생각에 창문을 열고 고개를 빼서 돌아보니 구름이 걷히면서 안나푸르나가 드러나고 있다. 얼른 밖으로 나와 슬리퍼를 등산화로 갈아 신고 전망대로 올라가니 다른 롯지의 사람들까지 전망대로 몰려나온다.
구름이 걷히면서 제 모습을 거의 온전하게 드러낸 안나푸르나. 오늘은 행운이 깃든 날이다. 사진 찍고 잠시 감상하는 사이 안개구름이 몰려오더니 순식간에 사방의 봉우리들을 다 감추고 만다.
내일 아침의 행운을 기약하며 롯지로 돌아왔는데, 독일에서 왔다는 커플 중 여자가 고소증세가 나타나 힘들어한다. 따뜻한 차를 주고 약을 챙겨 오는 사람들도 있고 도움을 주려고 마음들이 바쁜데,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진다. 올라왔을 때 살짝 고소증세가 나타나 약을 먹고 조금씩 움직이라고 했다는데, 힘이 드니까 누워서 살짝 잠을 잔 모양이다. 그러고 나니 증상이 확 나빠졌다고 한다. 결국 아래까지 내려가기로 하고 가이드와 포터가 짐을 챙기니, 여자는 힘들면서도 안타까워 눈물을 보이고, 남자는 더욱 마음이 급해져 허둥지둥하니 주변 사람들이 물건을 챙겨준다. 젊은 커플을 다 챙겨서 내려보내고 나서 사람들이 안정을 찾는다.
고소가 나타나면 고도를 낮추어 내려가면 금방 좋아진다고 하는데, 이 커플도 다음날 MBC를 지나 조금 더 내려가는 길에 만나게 되어 괜찮냐고 물으니 아주 좋다고, MBC에서 잘 잤다고 한다.
추워지는 온도를 느끼며 저녁으로 신라면을 시켜 먹으니 얼었던 몸이 확 풀리는 느낌이다. 이젠 온통 추위를 느끼는 일만 남아 뜨거운 물을 물통에 받아 내일의 멋진 일출을 기대하며 침낭 속으로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