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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날씨 Dec 06. 2021

서른하나의 끝자락, 나는 행복하지 않다.

공황장애를 가진 염세적 인간의 걱정



서른 하나.
1년을 꼬박 백수로 벌써 2021년 12월이다.



제법 따뜻했던 겨울 낮 반쯤 열린 창가의 화분과 홍시
10년 전 스물하나의 나는
[죽고 싶을 때 열어볼 편지]를 나에게 썼다.


 우체국까지 가서 본가에서 자취방으로, 자취방에서 본가로 받아 보관하며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그 편지의 봉투를 열어보았다. 그 편지에는 언젠가 미래에 힘들어할 나를 응원하고 다독이는 과거 힘들어하는 순간의 내가 있었다.


 햇살이 드는 창가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때 나에게 썼던 편지처럼, 일기장을 빼곡히 채워쓰던 생각들처럼 글로 적고 비워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거짓말처럼 brunch를 발견했다.





 나는 꽤 어릴 때부터 살고 싶지 않아 했던 것 같다. 변화를 싫어하고 새로운 것을 두려워했다. 2000년 밀레니엄이면 세상이 멸망한다는 말이 진실이길 바랐고, 세상에 내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지길 원했다.


 원래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키우기에 유독 정성이 많이 드는 섬세한 아이였고, 우리 집은 총칼은 물론이고 소리조차 없는 전쟁터였다. 눈치가 매우 빨랐다. 말귀도 아주 잘 알아듣고 분위기 흐름을 잘 파악했다. 화목하고 풍족한 가정에서 자라지 못하면서도 가장 추구했던 이상은 화목한 가정이었던 것 같다.


 엄마는 길에 지나가다가 머리방울 하나 사줄 수 없었다. 초등학교도 안 들어간 아이가 예쁜 머리방울 갖고 싶을 만도 한데 한사코 싫다고 하더랬다. 엄마가 묻고 또 물어서 들은 대답이


 '엄마 돈 없잖아,
나는 괜찮으니까 동생 장난감 사줘.'

였단다. 엄마는 물론 그 얘기를 들은 이모들도 짠한 눈물이 났다고 했다. 그 후로 내 머리방울을 사주신 적은  없다. 언젠가 머리를 잘 묶지 않을 나이까지 항상 이모들이 머리띠나 머리방울, 머리핀 일체를 야금야금 사주셨다.


 나는 그런 아이였다. 엄마에겐 어른스러워 기대면서도 너무 어른스러워 나중에 병나지 않을까 항상 걱정인 아이. 스스로는 화목한 가정을 꿈꾸며 이쪽저쪽 눈치 보며 원하는 것을 말하지 못하며, 양보해서 얻는 칭찬이 그저 좋은 아이.


 그런 성격을 타고난 나는 꾹꾹 눌러 20여 년을 살아내다가 대학 4학년 3월이 되자마자 갑작스러운 병이 왔다. 처음엔 염증이라고 했다. 1~2주 약 먹으니 곧잘 나았다. 1년 내내 자주 재발했다가 낫기를 반복하더니 연말쯤에는 자리를 잡아버렸다. 그렇게 또 일반 정형외과를 6개월 넘게 다녀도 일상생활이 점점 힘들어서 여름엔 대학병원으로 향했다. 할 수 있는 검사란 검사는 다 해봤으나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절망적이었고 어느 날부턴가 지하철을 타면 숨쉬기 어렵기 시작했다.


공황장애가 왔다.

 전공 살리는 취업을 포기했다. 아프면서 놀면 뭐하나 싶어 가벼운 회계세무 자격증을 취득했고, 전공 관련 전문가 과정 수료도 했다. 회계학원을 다니면서 걸어서 20분 거리를 못 가서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울다가 집으로 버스 타고 돌아오기도 했다. 괜찮은척해도 나는 이미 괜찮지 않았다.


 졸업하며 집에 있기 싫어서 취업을 핑계로 이모집에서 잠깐 살았다. 모든 가족이 잠든 사이 혼자 거실 소파에서 소리도 못 내고 엉엉 울기도 하고 열심히 운동도 해봤다. 내 몸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피가 나지 않고 뼈가 부러지지 않으니 사람들은 운동 안해서 그렇다며 아프다는 내 말을 믿어주지 않았고, 키우면서부터 염려하던 일이 일어나자 엄마 속은 타들어만 갔다.



 화목한 이모집을 보며 욕심이 났던 것 같다.


엄마 나 이모집이 화목해서 좋은데..
그래서 너무 힘들어

 동생이 군 휴학 후 복학을 하면서 둘이 같이 나와 살게 됐다. 나는 또 백수의 좋은 구실로 공무원 공부를 했다. 내 나름은 장애인 판정을 받아도 할 수 있는 직장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하고 싶은 게 생겼다는 말에 엄마는 돈 걱정하지 말고 일단 해보라고 하셨다. 2년은 밀어줘보겠노라. 미친 듯이 공부했다.


 공부는 거짓말처럼 잘되었지만 공황 증상은 심해졌다. 사람들 마주하는 일이 싫고, 전공을 살려 대학원, 박사까지 그것도 해외로 나가고 싶었는데 하루 3시간 앉아있는 것도 힘든 몸뚱이로 뭘 할 수 있겠나 싶었다. 전화벨 소리가 스트레스였고, 지하철에선 숨쉬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공무원 공부를 하다 보니 내 몸이 신기하게도 서서히 괜찮아졌다. 비록 합격은 없었지만.


스물여섯.

몸이 괜찮아졌을 때가 스물여섯이었다.


 하고 싶은 게 없어졌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죽고 싶다는 생각은 여전히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원인 없이 아팠다가 방법 없이 나았다. 언제 또다시 아플지 두려움이 지배하고 있었다. 갑자기 괜찮아진 사이, 그동안 몸에 근육이 다 빠지고 부은 상태라 왠지 몸이 힘든 일을 하고 싶었다. 많이 웃고 싶었고 내 성격을 바꾸면 공황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옷 판매 일을 시작했다. 경력도 없고 딱 봐도 공부만 했을 것 같은 초짜를 단번에 합격시켜준 고마운 분을 따라 이리저리 함께 4년을 같이 일했다.


 그 사이 나는 괜찮아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최악까지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하고 뭐든지 속에 담아두던 성격도 변했다. 지금의 내 가족을 뭉치는 건 포기하자고 마음을 내려놓았고 그로 인해 나는 좋아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부모님의 이혼 소송이 진행됐고, 공황이 다시 심해져서 힘에 부치기까지 했다. 몸이 많이 힘들고 돈은 안 모이고 여가시간조차 없는 고된 일이었다. 항상 웃으며 예쁜 말로 친절함을 유지해야 하는 일이 내 성격엔 피로일 뿐이었다. 브랜드를 바꾸어 가며 정리하고 오픈하는 일도 버거워졌다. 서른의 겨울, 어찌어찌 코로나도 겹쳐 사장님이 잠시 정리하고 쉬어야겠다 했을 때 나도 번아웃에 녹초였기에, 서른의 끝에서부터 기한을 정하지 않고 쉬기 시작했다.


늘어지게 놀았지.
집에 있는 게 너무 좋은 집순이다.


 마음이 정말 평화로웠다. 놀다 보니 면역력이 완전히 무너져서 아토피인지 온몸의 피부가 뒤집어져 선선해지는 가을까지 고생을 했다. 몸이 또 말썽인 것 빼면 세상에 이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면역력을 끓어 올리려 안간힘을 써야 했지만 집에 콕 박혀서 하고 싶은 거만 하니 즐거웠다. 몇 날을 집 밖을 안 나가도 행복했다. 봄부터 나의 백수 생활에 합류한 동생 덕에 타의로 격리도 2번이나 했지만 원래 나가지 않아서 격리 중인지 까먹을 정도로 집 밖을 안 나갔다. (물론 아예 외출을 안 한 건 아니다. 가족들 친척들 친구들도 만나고 날 좋을 땐 나들이도 갔고 산책도 자주 했다.)


 어느 날

똑 떨어진 화장품을 사고 나오는데 점원 얼굴이 생각나지 않는 것이다.


 내가 사람 눈을 안 마주치고 생활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불어 엄마의 일침이 날아왔다. '너무 계획 없이 놀고 있는 것 같아.' 그제야 '아차!' 했다. 4년 남짓 모은 통장엔 더 이상 놀 자금이 없었다. 전세인 이 집은 내년에 이사해야 할 확률이 높고 그 사이 오른 집값으로 전세도 배로 뛰었다. 현실이 닥쳐왔다.


 다시 판매 일을 하자니 막막했다. 정년보장은 물론 가족과 밥 한 끼 먹을 시간도 나지 않으며, 박봉에 월 5회 휴무, 몸은 몸대로 상하는 그 일을 평생 할 생각을 하니 까마득했다.


하고 싶은 일을 찾아야겠다!


 부랴부랴 해보고 싶은 일을 찾았는데, 전공자들을 이겨낼 자신이 없다. 그 정도의 확신도 없다는 거겠지. 비전공자들도 학원에서 배워 취업해 먹고 산다며 할 수 있다는 학원 상담사 말에 희망을 가져보는데, 우선 생계비가 문제다. 나는 판매 일을 다시 해서 먹고 살 돈을 우선 마련해야 한다. 탕진해버린 1년 동안 빨리 생각해봤으면 좋았을 텐데..


 그동안 부모님 지원받아 하고 싶은 거 다 해가며 사는 친구들은 잘 나가고 하나둘 결혼을 한다. 샘나고 분하다. 단지 살아있으려고 노력했다. 뭐 그렇게 대단한 스트레스라고 몸도 마음도 아팠을까?


 서른엔 나도 가정을 꾸리거나 드라마에 나오던 커리어우먼이 되어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 전공을 살려 나름의 성과를 내고 있겠지 했는데 이 나이에 진로 고민을 할 줄이야.. 그럼에도 나는 내 인생에 확신이 없다. 박차고 나아가기엔 당장에 걱정해야 할 주거 생계 문제로 버거운 상황. 뭔가 하고 싶다고 해서 덮어놓고 응원해주기에는 너무 들어버린 나이.


 일단 뒤로 미루기로 했다. 나는 여전히 살고 싶지 않다. 인간의 생이 너무 길다고 생각해왔고, 이렇게 불안에 살 것 같으면 안 태어나는 게 맞지 않으냐고 느껴왔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다시 감고 잠을 청한다. 이대로 잠들어서 다시 깨지 않기를. 하지만 나는 곧 생계에 뛰어들어 예쁘게 미소 짓고 있겠지.



나는

매일매일의 날씨처럼

예측 불가능한 감성을 가진

이상한 어른 아이가 된 것 같다.



 이런 불안한 나도 언젠가 좋은 아내,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삶을 포기하지 않고 잘.. 살 수 있을까? 서른 하나 12월. 지나간 나에 대해서 곱씹어본다. 앞은 캄캄하지만 살아내 보자!


글/사진 윤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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