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어느 늙은 산양 이야기> 고정순
우리 모임은 원래 그림책을 직접 만들어보자는 취지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림책을 만들기보다 그림책을 읽고 느낀 감동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하는 것 같다. 우리가 얼마나 창작이라는 삶의 방식을 사랑하는가를 느낀다.
나는 각자가 가장 사랑하는 그림책을 딱 한권만 골라보자고 했다. 이들에게 그림책을 딱 한권만 고르라고 하는 것은 무인도에 가게 되었을 때 꼭 가져가야 할 물건을 고르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몇 가지 조건을 덧붙였다. 첫째 우리가 사랑하고, 둘째 내가 만일 그림책을 그린다면 꼭 담고 싶은 내용을 담고 있고, 셋째 애써본다면 나도 그릴 수 있을 것 같은 그림책을 고르자고 했다.
내가 만든 조건이지만 나도 그 조건에 맞는 책을 고르는 게 힘들었다. 첫 번째 조건은 하나도 어려울 게 없다. 그림책이라면 뭐든지 좋아하니까. 두 번째도 그다지 어렵지 않다. 담고 싶은 이야기가 수도 없이 많으니까. 하지만 꼭 한 가지만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삶과 죽음, 또는 영혼에 대한 이야기일 것 같다.
나는 방귀나 코딱지 이야기를 좋아한다. 깔깔 웃게 하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골똘히 생각할 것 없이 보는 것만으로 웃게 해주는 게 좋다. 그래도 시간이 갈수록 자꾸 생각나는 책이 더 좋다. 그런 책은 또 다른 이야기가 숨어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책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책이다.
<잃어버린 영혼>은 내게 그런 책이다. <잃어버린 영혼>을 통해 올가 토카르추크를 처음 만났다. 그녀가 노벨문학상을 받기도 전이다. 그녀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작가 중 다섯 손가락에 꼽힌다. <잃어버린 영혼>은 딱 내가 원했던 책이었다. 내가 담고 싶은 이야기였다. 하긴 이 책을 읽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요안나 콘세이요의 그림이어서 더 좋았을 것이다. 요안나 콘세이요는 <천사의 구두>를 통해 만났다. 아니 그전에도 여기저기서 그녀의 그림을 보았지만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다가 어, 이 그림, 하면서 기억하게 되었다. 사실 그녀의 그림은 한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을 만큼 독창적이다. 수많은 이야기가 숨어있다. 깊이감이 남다르다. 세 번째 조건을 도저히 맞출 수가 없다. 그러니 패스.
사실 그림이라고는 몇 년 그려본 것이 전부인지라 그 어떤 그림도 내가 흉내내기는 어렵다. 다른 사람들도 세 번째 조건이 제일 까다로웠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연필 드로잉 그림이나 아이 같은 그림체를 골라왔다. 나도 아이 같은 그림체를 찾아 헤맸다. 나울 니에토 구리디의 <어려워>를 보고 이거다 싶다가, 오히려 너무 순수한 아이의 그림체라서 또다시 포기했다.
결국 내가 고른 책은 고정순의 <어느 늙은 산양 이야기>다. 고정순 님은 <아빠의 술친구>로 알게 되었는데, 보는 순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작가 스스로 그림책 분야에서 어둠을 담당하고 있다고 말할 정도로 그림이 어둡다. 어두운 정도가 아니라 절망스럽다. 내 안의 어둠과 절망을 다 꺼내놓고 같이 울어줄 것 같다. 다 보고 나면 바닥에 붙은 내 발만 보인다. 하지만 책을 덮는 순간, 자연스럽게 발을 내딛고 걸어 나오게 된다. 그런 힘이 있다.
더구나 <어느 늙은 산양 이야기>는 삶과 죽음의 이야기이다. 지팡이에 기댄 늙은 산양은 작가 자신이다. 죽을 날이 다가온 것을 안 산양이 죽을 자리를 찾아 길을 나섰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마지막은 각자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을 텐데, 그런 열린 결말이 너무 좋다. 나는 죽음을 생각하지만 아이들은 산양이 모험에서 돌아와 편히 자는 것으로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떤 이는 내일의 모험을 위해 자는 것이라고 하고 또 어떤 이는 모험이나 여행보다 집이 좋아서 자는 것이라고도 했다. 각자의 해석은 각각의 의미가 있다.
아이 그림체이긴 하지만 실크스크린 등 다양한 과정을 거쳐 나온 그림이라서 이것도 따라 그리기는 어렵다. 하지만 존 버닝햄의 그림을 따라 그리듯이(그림을 처음 그릴 때 존 버닝햄의 그림을 따라 그렸다) 그렇게 그려볼 수는 있을 것 같다.
구도나 단순미가 마음에 든다. 고정순 님이 들으시면 기함할 일이지만, 그래도 자신의 그림을 보고 그림책 작가의 꿈을 키운다고 하면 좋아하지 않을까.
<어느 늙은 산양 이야기>를 읽고 이야기가 하나 떠올랐다. 일종의 질문이며 그에 대한 대답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어느 늙은 부엉이 이야기 <난 웃는 게 좋아>를 더미북으로 만들어보았다.
갱년기를 보내는 친구들이 안락사를 많이 언급한다. 적당히 살다가 적당한 시기에 적극적으로 가겠다고 한다. 과연 적당히 산다는 건 뭘까. 언제가 죽기에 적당한 시기일까.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오래 살고 싶다던 인류의 염원으로 의학이 발전했지만 지금 그 의학은 오히려 저주가 되어 돌아온 듯하다.
<웃는 게 좋아>는 죽어질 때까지 자연스럽게 사는 이야기다. 깔끔 떨지 않고 살던 대로 사는 이야기. 죽을 때까지 뭘 하며 하루하루를 보내야 할지 고민스러웠던 적이 있다. 스스로 의미와 가치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삶이란 어떤 의미일까 싶어서. 한바탕 웃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하루가 되는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
너무 많이 담으려고 했고 너무 직설적으로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일단은 완성했고 앞으로 조금씩 다듬어가려 한다.
우리는 이렇게 창작에 진심이다.
- 천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