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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도하 Mar 05. 2023

자기감정 느끼기

VS 감정 서비스에 공감하기

   피곤하고 지친 일상이 반복되는 동안 해소되지 못한 갈등과 화가 쌓이고, 그럼에도 일상은 계속되어야 하므로 감정을 은폐하고 훈련된 자질과 개성을 발휘해 친절하고 능률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얼마 후면 주말이 낀 연휴가 있으므로 오늘 하루도 기계처럼 업무를 해치우며 넘겨 보낸다. 


연휴 때 특별하게 하고 싶은 일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일하지 않을 때는 소비를 하는 게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시대를 사는 것 같다. 쉬는 날이나 휴가 때 여행을 가거나 쇼핑하거나 맛집을 찾거나 영화를 본다. 아무런 활동을 하고 싶지 않은 나는 집에서 영화 보기를 선택한다. 정확히는 연휴가 시작되기 전날 저녁부터 드라마 정주행을 시작한다. 현실을 다루면서 과몰입할 수 있을 정도로 자극적이고 충분히 미워할 만한 인물이 있어야 하며 압도하는 긴장감이 필요하다. 


시간이 한 두 시가 지나가면서 몸이 뻣뻣하게 저려 오지만, 정신은 드라마에 완전히 몰입 되었다. 내 감정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며 극 중 인물들의 감정과 하나가 되어 분노와 슬픔과 좌절, 뒤틀린 희망을 느끼는 사이 어느새 히끄무레한 새벽빛이 밝아온다. 약간의 두통과 온몸이 뻐근하고 피곤하지만 아직도 휴일이 온전하게 남아있다. 그렇지, 휴일의 시작은 잠이다. 달고도, 달고도 단잠을 대여섯 시간 자고 나면 오후가 되고 평소에 잘 먹지 않는 라면을 끓여 먹는 것이 휴일의 맛이다. 


그때 쯤, 드라마의 잔상이 옅어지면서 격렬하고 대단했던 환상의 세계가 사라지고 무언의 어떤 힘이 황폐하고 복구가 필요한 현실로 나를 끌어다 놓으려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현실을 잊고 다시 또 환상 속에 머물고 싶을 뿐이다. 이번에는 더욱더 몰입하게 만드는 미스터리 영화를 보면서 치밀하고 논리적이고 지적인 해결사가 된다. 다음에는 낭만과 설렘이 있고 이왕이면 꿈같은 일이 이루어지는 이야기를 고르고, 인물들의 상황과 대사에 열렬히 공감하고 그들을 응원한다. 휴일 동안 나는 완전히 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온 것 같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채워지지 않는 허기와 계속해서 도망치고 싶은 간절함은 뭔가. 결국 나에게 남은 건 꿈 같았던 신기루에 대한 기억과 내일은 출근이라는 현실과 재충전 되었는가에 대한 의구심이다.        

  


   수년 동안 나는 이런 일을 반복했던 것 같다. 극중 인물에 동화돼서 화난 감정을 분출할 수 있고, 이성적이고 유능한 사람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때부터 더는 카타르시스가 아니고 에너지를 충전하기보다 방전시킨다는 걸 느끼면서도 현실과 내 부정적인 감정에서 벗어나 도망갈 수 있는 은신처로 사용했다. 


우리는 본연의 개성을 드러내는 대신 이성적이고 능력 있는 훈련된 개성과 자질을 드러내고 부정적인 감정은 은폐하도록 암암리에 교육 받는다. 나는 다른 건 몰라도 부정적인 감정을 은폐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어쩌다 보니 제법 엄격하게 훈련된 것도 같다. 하지만 문제는 숨겨진 감정을 나조차도 외면했다는 데 있다. 그걸 덮어두고 살펴보지 않으니 화가 났는지, 화가 났다면 무엇 때문인지, 무엇에 실망했는지, 시기심인지 두려움인지 모르고 그저 내 감정이 불편하고 왠지 모르게 불만스럽거나 우울하다. 나는 드라마 속 인물의 개성과 감정을 알고 이해하지만 정작 나 자신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오랜 시간 무관심으로 방치되었던 나는 늘 자신으로부터 도망칠 궁리만 한다. 휴일에 TV나 영화를 보면서 빠져들어 격렬해지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생산적이지 않은 스스로가 불안하다. 


무엇을 위해 나 자신은 버려두고 유능하고 훈련된 개성을 가진 인간을 연기하려고 했을까. 타인에게 해가 되지 않는 한 본연의 개성과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자연스럽다. 지금껏 나의 감정을 어떤 식으로든지 드러내는 법을 훈련하지 못했을지라도, 이제부터 그런 연습을 해 보아야 할 것이다. 지혜롭고 자연스럽다면 더욱 좋겠다. 내 삶은 그것 자체가 목적이지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지 않은가.            


   요즘에는 내 감정을 느끼고 인정하기를 먼저 한다. 그래서 감정의 때가 꺼실 거린다 싶으면 걸으러 나간다. 물론 산책하는 한두 시간 사이에 무슨 뾰족한 변화가 있을까 싶고 그냥 퍼져 잠이나 자고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럼에도 걷는 동안 생각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내 발소리를 듣고 움직임을 느끼고 따라가다 보면 나 자신이 보인다. 그렇다고 스스로 해결책을 내놓거나 감정이 순식간에 바뀌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내 감정의 시작점이 보이고 그 근원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내가 듣고 싶어 했던 위로를 스스로에게 해주고 마음이 힘들었겠다며 다독여 준다. 그래서 뭐 어때,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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