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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도하 Mar 06. 2023

「1984」

조지 오웰

  디스토피아 소설을 읽고나면 괜스레 심각하고 울적해진다. 실제로 처한 현실이 아닌 게 다행이다 싶고, 행여 그렇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란 생각에 그런 일이 없도록 일상을 반성하게 된다. 어떤 문제들이 소설 속 상황을 초래했는지 생각하고 그런 문제들의 싹이 자라나지 않도록 하겠다는 가당치도 않은 다짐까지 하게 된다.      



윈스턴이 살았던-총살당해 죽었으므로 과거형이다-1984년 유라시아는 스탈린 체제하에 있는 소련에 그대로 대입되는 것 같고, 그렇다면 자유민주주의인 이곳은 이미 문제로부터 아주 멀어진 것 같아서 우선은 안도하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의구심이, 개운치 않은 뭔가 남아서 나의 염려는 말끔하게 씻겨나가지 않는다. 그렇다, 권력과 억압이 어디 소련이 특허 낸 창의적인 산물이더란 말인가. 수시 때때로 권력 앞에 무력해지고 억압에 눌리고 자칫 개인의 생각을 함부로 말했다가 낭패를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 않나. 그동안 우리는 암암리에 부정적인 감정은 은폐하고 대세에 반하는 말은 삼가도록 교육받고 훈련하지 않았던가. 휴... 생각해 보니 그간에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억압받지 않지 않았구나 싶어서 열이 오른다.       



  이 책에 관한 주제와 해석에 대해서는 너무 잘 알려져 있기도 하지만, ‘시리’나 ‘빅스비’를 연상시키는 구술 기록기나 노래 만드는 기계와 같은 당시에는 없던 첨단 기술, 생각을 바꿀 정도의 고문, 존재해 왔지만 이름이 없었고 마침내 참신한 이름을 얻은 ‘이중사고’, 언어의 힘을 역설한 신어의 원리, 제각각의 개성을 가진 인물들, 윈스턴의 사랑과 여성에 대한 생각과 태도, 무엇보다 빅 브라더의 책에 서술된 논리적이고 생생한 이론, 생각이 많아지는 이 모든 것들 중에 어떤 내용을 써야 할지 망설이게 된다. 그래서 나는 인물 중에 윈스턴을 조금 다른 면에서 보기로 했다. 



  책을 읽고 시간이 지날수록 나도 모르게 윈스턴 스미스라는 남자에 대해 곱씹게 되었다. 그건 아마 ‘그가 줄리아를 사랑했을까’ 하는 단순한 질문에서 시작되었고, 그렇게 몇 번인가 그 남자를 떠올리다가 내 나름의 논리인지 억측인지를 발견하게 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지성적이지 않은 존재를 좋게 여겼다. 그는 복권을 살 때만 머리를 쓰는 노동자들에게 진정한 힘과 지혜가 내재해 있다고 여기고 줄리아의 (지성적이지 않지만) 순수하고 단순한 열정을 비판 없이 받아들인다. 그가 연인과 처음으로 사랑을 나누는 장소는 물푸레나무들이 울창한 자연 속이었고, 뜻 모르게 지저귀는 새와 노래하는 나이 든 여인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무한정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것만 같은, 수십 번을 반복해서 공을 굴리면서도 질리지 않는 아이의 공을 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그는 지성적이지 않은 존재들이 선하고 지혜롭다고 여기며 그 앞에서만은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면일랑 놓아두고 마치 할아버지가 손주를 보듯 관점이 너그럽다. 그렇지만 그 자신은 친구 사임과 신어의 원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빅 브라더의 ‘그 책’을 정성들여 읽을 정도로 지성적이다. 노동자들에게 죽음은 예기치 않게 다가오지만 그는 죽음을 향해-전진하는 것은 아니며 받아들이듯-다가간다. 그래서 나는 그가 약하고 무해한 존재에서 가능성을 찾았던 것처럼 자신의 자질과 그 자신의 가능성을 소중하게 여겼더라면 하는 터무니 없을지 모를 안타까움을 느꼈다.     



  윈스턴은 사생활을 간섭받지 않고정치적 믿음을 강요받지 않고권위의 변덕에 휘둘리지 않는 사회를 희망했다. 그리고 그의 사랑은 어떤 면에서 도덕적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면을 표방한다. 그는 모든 강요받는 것들을 끔찍하게 여기고 그것에 반항하지만, 아무것도 간섭받거나 강요당하지 않는 순간에는 선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회복한다. 그가 마지막으로 골동품점 이층에서 안락의자에 앉아 책을 읽었을 때, 창밖을 바라보는 시선은 따사롭고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윤리적으로 선함이 느껴진다. 이것은 도덕성이나 착한 사람이 되라는 식의 조언이나 요구에 응하지 않지만, 강요당하지 않는 차분한 순간에는 선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현재 우리의 모습을 닮았다. 윈스턴이 바라던 사회의 이상은 현대 민주주의 정치사상의 주요 전제를 대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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