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베카 솔닛
<동물 농장>과 <1984>로 잘 알려진 영국 작가 조지오웰은 전쟁의 시대를 살았다. 그는 보어전쟁 직후인 1903년 6월 25일에 태어나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사춘기를 지났고, 성년이 될때까지 러시아혁명과 아일랜드독립전쟁이 계속되었다. 1930년대 제2차 세계대전의 분위기가 고조되던 무렵 1937년에 그는 스페인내전에 참전했다. 1945년 냉전시대가 시작되었고 그의 마지막 작품 <1984>가 1948년에 출간되었고 1950년 1월 21일 그는 세상을 떠났다.
그는 1936년부터 1940년까지 허트포트(Hertfort)지역의 외딴 시골마을 윌링턴에서 살았다. 뒷마당에 가축을 키우고 마당에 사과나무를 심고 울타리에 장미묘목을 심었다. 그는 “글 쓰는 본업 외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은 정원 가꾸기, 특히 텃밭 가꾸기이다.”라고 말했던 만큼 그 일에 노동과 정성을 쏟았으며 이 땅을 사랑했다. 그는 “사과나무도 100년은 너끈히 산다. 그러니까 내가 1936년에 심은 콕스 사과나무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열매를 맺을 것이다.”라고 했다.
리베카 솔닛의 <오웰의 장미>는 윌링턴 마을에 오웰이 살았던 집을 찾아가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외딴 시골마을에 위치한 크지 않은 이층집에는 그녀가 방문했을 때 여전히 누군가(그레이엄 부부)가 살고 있었다. 솔닛은 오웰이 심었던 사과나무가 남아있기를 바랐지만 그 대신 오웰이 심었던 장미가 앞마당에 넝쿨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오웰의 장미>는 조지 오웰의 전기나 작품 해설집이 아니다. 솔닛은 다만 자연과 이 땅에 대한 오웰의 애정과 그의 삶에서 각각의 이야기를 시작할 뿐이다. 그녀의 이야기는 리좀형으로 뻗어 나아가 우리가 실제로 보는 것들이나 현상의 이면, 그동안 보지 않았거나 볼 수 없었던 것들을 생생하게 비춰서 보여준다. 산업혁명의 발판이 된 광산 노동자들의 삶, 아름다운 장미를 생산해 내는 공장의 노동자와 그곳의 환경, 귀족적이고 젠틀한 영국 이미지 뒤에 있는 식민지의 고통과 노예들의 눈물과 비참한 죽음, 체제하에서 잔인하게 쓰이고 무참하게 버려지는 개인(모도티)의 삶. 이것들 모두는 조지 오웰이 살았던 시대의 모습이자 오웰의 경험과 배경이었고 현재까지 명맥을 유지하는 부조리의 단면들이다. 이런 이야기 속에서 “1936년, 한 젊은 작가가 장미를 심었다”라는 시구처럼 반복되는 낭만적인 구절은 밀도 높은 공간에 작게 뚫린 통풍구 같은 역할을 한다. 이 문장을 만날 때면 잠깐 숨을 돌리고 오웰이 오랜 시간을 보냈던 정원을 상상하면 아름다운 심상에 머물게 된다.
솔닛의 책을 읽어 가는 동안 오웰의 소설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오웰의 낭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1984>를 읽었을 때는 그 속에서 오웰의 낭만일지 모른다고 여긴 부분들이 있었다.) 그런 사이에 나는 오웰의 정원에 막연한 애정이 느끼게 되었고 마음이 녹녹해져서 장미와 사과나무를 (심을 만한 땅이 없지만) 심고 싶어졌다. 반면에 장미 꽃다발을 선물 받고 싶던 마음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우연히 가지게 된 랄프로렌 옷을 버릴까 고민(까지만)하게 되었고 한때 영국에서 유행했고 현재는 ‘꾸안꾸’로 통하는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에 대한 심적 정의가 달라졌다. 모든 것이 다 똑같이 거짓말이고 썩었다는 단언적인 태도를 가졌던가를 스스로 돌아보게 되었고, 진실과 허위 사이의 구분에 열정적이고자 하는 동기가 생겨났다. 명징성, 엄밀성, 정확성, 진실성 같은 것들에 대한 애착이 생겼으며 심미적 가치이자 즐거움이 되기를 희망하게 되었다.
1936년 영국에 탄광촌과 스탈린의 정치이념이-스탈린이 앞마당에 심은 레몬 나무는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2022년 콜롬비아에 장미 공장과 푸틴의 이념으로 여전히 건재하는 듯하다. 반가운 것은 오웰에서 솔닛으로 이어지는 이야기 또한 건재한다는 사실이다.
책을 읽고 나서 노트북에서 먼저 장미를 검색해서 종류며 키우는 방법 등을 읽고, 묘목을 인터넷으로 구매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반가워서 일단은 장바구니에 담아뒀다. 하지만 여전히 아파트 집 어디에도 심을 만한 곳이 마땅치 않다. 탄소로 빚어진 200년 문명의 이기가 내게서 소중한 무언가를, 어떤 기회를 빼앗기라도 한 듯이 (얻고 누린 게 없지 않지만) 서운하고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지금도 내가 사는 주위에 아파트는 계속해서 지어지고 나무와 꽃들은 화초와 꽃다발이 되어 아파트 큐브 속으로 밀어 넣어졌다. 기후도 종종 제정신이 아니게 되는지 가을날 캐나다 토론토에 우체통을 녹일 만큼 달아오르고, 빙하의 눈물은 수시로 걱정을 안겨준다.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왔고, 물이 아래로 흐르듯 흘러왔을 테지만 진보와 효율성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새로운 물꼬를 터야 할 때라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린다.
환경과 생태를 보존하고 가꾸는 일이 누군가 의식을 가져야만 실천하는 게 아닌, 지난해 마스크를 쓸 때처럼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는 날이 올 테지. 하지만, 분리수거 잘하고, 일회용품 사용하지 않고, 비싸더라도 에너지 효율 좋은 제품을 사고, 대중교통 이용하는 것들은 주위 사람들 모두 습관처럼 지키는데 어째서 환경은 언제나 병환 중인 걸까.
그렇다면 자동차를 타지 말아야 하나, 보일러를 틀지 말아야 하나, 탄소를 태워 만든 물건을 쓰지 말아야 하나, 진보를 알리는 신제품에 솔깃하지 말아야 하나... 에휴…. 환경보호와 소비의 균형이란 복잡하고 어려워 보인다. 우리는 상품의 가치를 설득하는 프로파간다(강요된 믿음) 속에 살고 있어서, 날마다 새로운 어떤 것이 필요하지 않으냐, 있으면 좋다, 필요해야 한다, 그러니 가져라고 부추기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지구가 죽어간다, 인간실존의 위기다, 환경을 보호해야 한다고 겁주기도 하니까 말이다.
‘지금 여기’에 있는 나는 분리수거를 하러 나갈 참이며, 봄이 되면 화분에라도 장미 묘목을 심을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