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도하 Feb 14. 2023

『속죄』

이언 메큐언, 영화 <어톤먼트>

   『속죄』를 읽고, 이야기의 짙은 감흥과 여운에서 빠져나오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비로소 자아와 현실감을 되찾고 나서 든 생각은. 나를 재료로 삼은 지난 거짓말들이 어쩌면 그들이 악의적인 의도를 품고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다만 상상력과 인식의 혼동이 빚어낸 결과이며, 적어도 그 당시에 그들에게만은 진실이었을까 하는 것이다. 한 사람에게서 흘러나온 거짓말은 나를 둘러싼 주변 세상으로 퍼져 나가고 어느새 그것은 진실이라는 명예 훈장이 달린 외투를 입고 내 앞에 높은 그림자로 서 있다. 그것은 감옥의 쇠창살처럼 단단하고 서늘하며 벗어날 방법이 없어 보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외면하고 잊어버리거나 그런 척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잊기 위해 애쓰던 시간 동안 그 사람의 상상과 인식의 흐름 안으로 들어가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진작에 지워져 버리고 없을 말들이 여전히 내게는 상처에 덧붙은 딱지처럼 남아 있다.

   하루 아니면 이틀 동안. 고요해진 시간에, 산책길에서, 차를 마시거나 물끄러미 창밖을 보면서 과거 속에 머물며, 당시의 상황들을 더듬어 최대한 세세한 것까지 기억해 낸다. 그의 주위를 맴돌며 그의 상상 속을 비집고 들어간다. 이것은 나의 상상이며, 그 상상 속에서 그가 느끼는 두려움과 절박함, 나를 향해 느끼는 어렴풋한 적대감이 내게 전해진다. 그가 보는 분명히 나와 다른 듯해 보이는 나 자신이 보이고 한 발 떨어진 자리에 서서 객관적이라고 할 만한 나를 상상한다. 그러던 어느 순간, 부드러운 바람이 머릿결을 흔들고 지나가던 때 문득, 우리가 같이 나약했던 한 시절을 보냈거나, 혹은 그저 평범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마침내, 내가 스스로 만든 장벽 너머로 밀어냈던 그는 인제 그만 들여보내 지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애초에 밖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는 듯 의아한 표정으로 서 있다. 

   소설은 분수대에서 일어난 아주 작은 사건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인물들 저마다의 내적 필연성에 근거하여 (도덕성과 정당성에 의심을 품을 수 있는) 어떤 결과들을 구축해간다. 그래서 이 책은 하나의 명확한 설계, 이야기를 강하고 모순에 견디게 만드는 구조를 지녔다. 작가의 섬세하고 매력적인 안내 덕분에 독자는 저항감 없이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되고 꽃길을 걷는 마냥 내내 황홀감을 느낀다.

   이 소설에서 두드러진 점은 하나의 사건을 여러 사람의 경험으로 그려낸 것이다. 분수대 사건을 보는 세 사람의 서로 다른 생각과 의식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다. 세실리아의 경험으로만 묘사하고 넘어갈 것 같던 사건이 로비의 입장에서 다시 서술되었을 때 ‘아, 로비의 마음은 이랬구나, 모를 뻔했어… 로비 너는 매력적이고 좋은 사람이구나.’ 이후에  브리오니의 입장에서는 ‘어린아이의 눈으로,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거리에서, 그 장면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 수 있지, 그렇지…’, 하지만 그 지점에서 답답하게 조여오는 분위기를 느끼며 이 매듭이 또 다른 사건의 발단이 되리라는 걸 짐작하게 된다. 브리오니에게 로비가 위험한 인물이라는 경고등이 켜지는 순간이다.


   로비와 세실리아의 삶은 브리오니의 거짓말로 완전히 붕괴된다. 로비와 세실리아는 특별히 선하거나 악하지도 않은 인물로 그려진다. 세실리아는 케임브리지를 졸업한 여성으로 세간의 통념을 깨고 사회에서 자기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 불투명해 보이며, 귀족층의 잔재가 유물처럼 남아 있는 집안의 첫째딸이다. 로비는 그 집 정원사의 아들이지만 교육에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주인집 자녀들과 어울려 자란 것으로 미루어 타고난 신분에 비해 유복한 유년과 청년기를 보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반면 저택의 삼 남매 중 브리오니는 대저택의 정신적 유산이자 영국의 유산이라 할 만한 신분제, 권위적이고 엄격함, 식민지를 뒷배에 두어야만 가능한 여유와 기품을 물려받을 수도 있을 것 같은 인물로 보인다. 첫째인 로런은 권위적이거나 지켜내는 따위의 일에는 이미 관심이 없어 보이고, 둘째 세실리아는 신분의 벽을 넘는 사랑을 구현하는 반면에 브리오리는 아직 유연할 정도로 어리고 자유분방하기 보다는 질서를 강조하고 엄격한 면이 있기 때문이다. 

    로비가 죄를 뒤집어쓰는 과정은 암시적이고 은폐된 긴장감이 느껴진다. 로비의 학업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던 아버지 잭 탈리스는 자취를 감추고, 적어도 진실을 알고 있었을 어머니 에밀리는 묵인하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관습을 전승하듯 부패한 정신적 유산을 브리오니에게 남긴다. 이런 안일한 태도는 아버지의 부재로 와해되어 오던 가정, 영국의 대저택을 결국 허울만 남게 만든다. 세실리아를 제외한 나머지 어른들은 열 세살 브리오니가 사방이 막힌 방안에 있는 버튼을 누르기만을 기다린다. 그 버튼이 로비의 삶을 붕괴시키리라는 진실을 이해하고 명백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건의 진실과 정확성을 찾기를 포기하고 믿기 편리한 진실을 믿으려는 태도를 보인다. 이것은 권위적인 체제하에 있는 사람들이 강요당하는 행동요령이며, 사람들에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관습과 문화 또한 그런 권위를 누리게 된다.


   읽는 동안 브리오니가 언제쯤 처단 받을 지 오매불망 기다리지 않게 된 것은 이 모든 책임이 열세살 아이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그의 죄를 끝내 단죄하지 못하는 마음이 드는 이유는 그의 시선으로 바라본 경험과 스스로 택한 속죄의 과정을 곁에서 지켜봤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책을 덮고 나서까지 용서할 수 없는 인물들, 마셜과 롤라가 남는다. 만약에, 작가가 이들의 생각과 상황에 대한 그들의 인식을 보여주었더라면 아마도, 죄는 미워하되 그들의 행동과 선택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일렁였을 것이다. 그들은 사업이 번창하기를 열망하고 사업의 이윤을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선하다고 여기며 실천하는, 충분히 선한 사람들과 닮았다.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들이 겪거나 스스로 선택한 속죄의 방식이 있었다면 기꺼이. 무더운 여름 어느 날, 파란 하늘과 초록이 맞닿은 교외의 한 저택에서 느끼는 달콤한 여유와 한결 느긋해진 마음이 그를 충동질 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연한 상황에 맞닥뜨리고 억누를 수 없는 열정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고 그는 믿지 않는다. 안온한 그늘 안에만 머물던 십 대 소녀에게 갑자기 닥친 부모의 이혼, 애인에게로 떠나버린 어머니, 남겨진 쌍둥이 동생. 앞날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그녀를 어린 시절로 뒷걸음치게 만들고, 어른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한 채 나약하고 오로지 보호받아 마땅한 아이로 남고 싶어 한다. 


   아름다운 이야기에 감동하고 악을 증오하는 무수히 많은 사람 중에는 우리가 저마다의 이유로 좋아하지 않거나 미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쩌면 우리에게 미운 감정이 우성인자로 내재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완벽한 선이 아니라면 모든 상황에서 발현되고 마는. 살아남아야 하는 숙명을 가지고 태어난 이상 두려움의 감정은 수시로 작동하는 예민한 것이며, 우리는 미움과 증오의 근원에서 두려움을 발견한다. 두려움과 의지가 한데 섞였을 때 창출된 악행들이란. 하지만 우리가 상대의 경험과 의식에 내재한 두려움의 서사를 이해하고 나면 얼마간은 전의를 상실하게 되고, 이어서 우리가 하나의 공동체 안에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게 아닐까.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기, 이것은 소설이 해 낼 수 있는 탁월한 기능이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고 나서야 인간성에 대한 신뢰를 회복할 수 있게 된다. 세상에는 다양한 인간 군상이 있으며 우리는 어떤 우연에 의해 서로 만나 관계 맺는다. 모두가 각자 자기 내면의 필연성에 따라서 생각하고 행동한다. 사람들 간에 완벽한 합일점이란 존재하지 않는 탓에 서로 부대끼면서 상처 입고, 어떤 이들은 오직 일신을 보호하는 것에만 충실한 나머지 껍데기를 지켰을지언정 추악한 것들이 붙어 비대해진 무엇이 된다. 이언 매큐언은 9.11테러 사건 직후 ‘가디언’지에 다음과 같은 논평을 실었다. "비행기 납치범들이 상상력을 발휘하여 승객들의 생각과 느낌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면, 이런 일을 계획했더라도 끝까지 진행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 다른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할까. 어떻게 느낄까 상상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성의 본질이며, 동정과 연민의 핵심이고도덕성의 시작이다.” 상상력이란 지식만으로 빚을 수도, 모종의 경험과 훈련 없이 자동 발현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동정과 연민, 상상력, 도덕성에 생명을 불어넣을 자극을 고안하고 찾아야만 하고 그러한 자극을 수시로 경험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속죄』는 멋진 경험을 선물한다.



작가의 이전글 『명상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