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류정희 Oct 03. 2022

천리안

 딸아이 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중학교 배정을 위한 서류를 제출하라는 문자였다. 근거리 학교 배정이 우선인 요즘은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집 근처에 있는 중학교에 다니게 된다. 초등학교 친구들과 함께 같은 학교에 가는 경우가 많아서인지 중학교 입학을 앞둔 딸아이는 긴장하는 기색이 없다. 나로서는 참으로 부러운 일이다.


 면 단위의 시골 마을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당시에는 꽤나 번화했던 읍에 있는 여중학교에 들어갔다. 한 학년에 열 개 반이 넘는 꽤 큰 학교였다. 지금보다 훨씬 숫기가 없었던 나는 입학식 날부터 잔뜩 긴장을 했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수다를 떠는 아이들 속에서 나만 이방인인 것 같아 기가 죽었다. 앞으로 펼쳐질 중학교 생활이 어둡게만 느껴졌다.


  드르륵. 교실 문이 열리고 담임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나는 초등학교 육 년 동안 그렇게 앳된 선생님을 본 적이 없었다. 선생님은 모름지기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이어야 하는 줄 알았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오셨다는 선생님은 우리와 딱 십 년 차이가 났다. 나이 차가 많은 언니 오빠를 둔 나에게는 그야말로 언니뻘인 셈이었다.  


 나의 중학 생활은 빛을 찾았다. 매일 선생님을 보는 것이 좋았다. 자전거로 먼 거리를 통학하는 내게 선생님도 집이 멀어 기차를 타고 다니신다며, 하교할 때마다 사탕 하나를 건네 주시곤 했다. 선생님은 그 사탕 하나의 힘을 아셨을까. 그 큰 위로와 격려의 힘을...

 

 나는 선생님의 따뜻한 눈길 덕분에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해 나갔다. 점점 자신감도 회복되었다. 선생님께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지만 수줍음 많은 소녀는 선생님 앞에 서기만 해도 얼굴이 빨개졌다. 할 수 없이 소극적인 표현 방법으로 선생님이 가르치신 사회 과목을 열심히 공부했다. 어려운 지리를 외우고 또 외우고... 우리나라에는 산도 많고 강도 많다는 것을 중학교 1학년 때 제대로 알았다.


 두 번째 학기도 훌쩍 지나 겨울방학이 다가오고 있었다. 선생님께 표현 한번 못하고 학년이 바뀔 것 같아서 나는 마음이 급했다. 가진 재주가 딱히 없다는 것이 스스로 원망스러웠다. 당시에 손재주가 좀 있는 사람들은 예쁜 그림 카드를 만든다거나 뜨개질로 장갑이나 목도리를 떠서 선물하곤 했는데 나는 그런 손재주도 없었다. 


 그나마 할 수 있는 게 편지를 쓰는 일이었다. 문구점에서 편지지를 고르다가 문득 남이 꾸며놓은 편지지는 쓰고 싶지 않다는 괜한 오기가 생겼다. 투박한 나의 진심은 화려한 편지지 안에서 빛이 바랠 것 같았다. 하얀 백지 위에 주절주절 긴 편지를 썼다. 대면해서는 안 나오던 말이 글로는 참 편하게 술술 나왔다. 편지를 부칠까 말까 고민을 했지만 용기를 내서 부쳤다.


 며칠 후 답장이 왔다. 엽서 가득 눈에 익은 글씨가 빼곡했다. 선생님이 칠판에 쓰시던 글씨체와 똑같았다.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는데 한참이 걸렸다.  


 '네 혀끝보다 손끝이 강하다는 걸 오늘에야 알았구나. 선생님이 천리안을 갖지 않는 한 어찌 알았겠니?'

 선생님의 엽서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마무리되어 있었다.

 '마음을 보여줘서 고마워!'


 나는 이 년 후, 더 큰 도시에 있는 고등학교에 입학 원서를 냈다. 입학시험을 며칠 앞두고 선생님은 빵집에 나를 데려가셨다. 다양한 빵들이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골라보라며 선생님이 쟁반을 내미셨다. 그렇게 큰 빵집에 가 본 적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가짓수가 많은 것에 놀라서 나는 한동안 그냥 서 있었다. 그리곤 그저 수수한 팥빵을 집어 들었다. 선생님은 쟁반 가득 여러 가지 빵을 골라 올리셨다.


 "고등학교에 가면 이렇게 다양한 친구들을 만날 거야."

 선생님은 쟁반에 올려져 있는 빵들을 보며 말씀하셨다. 내가 집어 든 팥빵을 다른 빵 위에 올리시고는 코를 찡긋하셨다. 


 "천리안 기억나니? 내가 요즘 그걸 갖게 된 것 같거든. 우리 정희 앞 길이 탄탄대로네 하하!"


 나는 선생님의 천리안을 믿었다. 그리고 이제 나도 천리안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소중한 이들이 탄탄대로를 걷기를 바라는 그 마음이 선생님의 천리안이라는 것을 알기에.


 







작가의 이전글 그녀의 책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