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 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중학교 배정을 위한 서류를 제출하라는 문자였다. 근거리 학교 배정이 우선인 요즘은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집 근처에 있는 중학교에 다니게 된다. 초등학교 친구들과 함께 같은 학교에 가는 경우가 많아서인지 중학교 입학을 앞둔 딸아이는 긴장하는 기색이 없다. 나로서는 참으로 부러운 일이다.
면 단위의 시골 마을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당시에는 꽤나 번화했던 읍에 있는 여중학교에 들어갔다. 한 학년에 열 개 반이 넘는 꽤 큰 학교였다. 지금보다 훨씬 숫기가 없었던 나는 입학식 날부터 잔뜩 긴장을 했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수다를 떠는 아이들 속에서 나만 이방인인 것 같아 기가 죽었다. 앞으로 펼쳐질 중학교 생활이 어둡게만 느껴졌다.
드르륵. 교실 문이 열리고 담임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나는 초등학교 육 년 동안 그렇게 앳된 선생님을 본 적이 없었다. 선생님은 모름지기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이어야 하는 줄 알았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오셨다는 선생님은 우리와 딱 십 년 차이가 났다. 나이 차가 많은 언니 오빠를 둔 나에게는 그야말로 언니뻘인 셈이었다.
나의 중학 생활은 빛을 찾았다. 매일 선생님을 보는 것이 좋았다. 자전거로 먼 거리를 통학하는 내게 선생님도 집이 멀어 기차를 타고 다니신다며, 하교할 때마다 사탕 하나를 건네 주시곤 했다. 선생님은 그 사탕 하나의 힘을 아셨을까. 그 큰 위로와 격려의 힘을...
나는 선생님의 따뜻한 눈길 덕분에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해 나갔다. 점점 자신감도 회복되었다. 선생님께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지만 수줍음 많은 소녀는 선생님 앞에 서기만 해도 얼굴이 빨개졌다. 할 수 없이 소극적인 표현 방법으로 선생님이 가르치신 사회 과목을 열심히 공부했다. 어려운 지리를 외우고 또 외우고... 우리나라에는 산도 많고 강도 많다는 것을 중학교 1학년 때 제대로 알았다.
두 번째 학기도 훌쩍 지나 겨울방학이 다가오고 있었다. 선생님께 표현 한번 못하고 학년이 바뀔 것 같아서 나는 마음이 급했다. 가진 재주가 딱히 없다는 것이 스스로 원망스러웠다. 당시에 손재주가 좀 있는 사람들은 예쁜 그림 카드를 만든다거나 뜨개질로 장갑이나 목도리를 떠서 선물하곤 했는데 나는 그런 손재주도 없었다.
그나마 할 수 있는 게 편지를 쓰는 일이었다. 문구점에서 편지지를 고르다가 문득 남이 꾸며놓은 편지지는 쓰고 싶지 않다는 괜한 오기가 생겼다. 투박한 나의 진심은 화려한 편지지 안에서 빛이 바랠 것 같았다. 하얀 백지 위에 주절주절 긴 편지를 썼다. 대면해서는 안 나오던 말이 글로는 참 편하게 술술 나왔다. 편지를 부칠까 말까 고민을 했지만 용기를 내서 부쳤다.
며칠 후 답장이 왔다. 엽서 가득 눈에 익은 글씨가 빼곡했다. 선생님이 칠판에 쓰시던 글씨체와 똑같았다.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는데 한참이 걸렸다.
'네 혀끝보다 손끝이 강하다는 걸 오늘에야 알았구나. 선생님이 천리안을 갖지 않는 한 어찌 알았겠니?'
선생님의 엽서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마무리되어 있었다.
'마음을 보여줘서 고마워!'
나는 이 년 후, 더 큰 도시에 있는 고등학교에 입학 원서를 냈다. 입학시험을 며칠 앞두고 선생님은 빵집에 나를 데려가셨다. 다양한 빵들이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골라보라며 선생님이 쟁반을 내미셨다. 그렇게 큰 빵집에 가 본 적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가짓수가 많은 것에 놀라서 나는 한동안 그냥 서 있었다. 그리곤 그저 수수한 팥빵을 집어 들었다. 선생님은 쟁반 가득 여러 가지 빵을 골라 올리셨다.
"고등학교에 가면 이렇게 다양한 친구들을 만날 거야."
선생님은 쟁반에 올려져 있는 빵들을 보며 말씀하셨다. 내가 집어 든 팥빵을 다른 빵 위에 올리시고는 코를 찡긋하셨다.
"천리안 기억나니? 내가 요즘 그걸 갖게 된 것 같거든. 우리 정희 앞 길이 탄탄대로네 하하!"
나는 선생님의 천리안을 믿었다. 그리고 이제 나도 천리안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소중한 이들이 탄탄대로를 걷기를 바라는 그 마음이 선생님의 천리안이라는 것을 알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