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꺼진 역사(驛舍) 앞에 딸아이와 함께 앉아있었다. 마지막 기차를 보내고 나면 역사도 불이 꺼진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자정을 넘어가니 희미하게 밝혀주던 가로등마저 소등되었다. 역 앞에는 택시 두 대가 마지막 손님을 기다리며 서 있었다. 내가 손님이 될 기미가 없어 보였는지 그들도 천천히 역 앞을 빠져나갔다. 인적이 끊긴 역사의 밤은 고요하기만 했다.
역 앞 벤치에 앉아 상황을 곱씹어 보았다.
나는 기차 출발시간을 한 시간이나 앞두고 역에 도착했다. 차 시간에 맞추느라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여유로웠다. 그 역에서 같은 코스로 기차를 여러 번 탄 경험이 있기 때문에 나는 당연히 입구와 승강장이 어디인지 잘 알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승강장으로 내려갔다. 남편에게 곧 출발한다고 전화를 하고 타는 곳을 찾아 줄을 섰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어쩐지 타던 곳이 아닌 것 같은 어색함이 느껴졌다. 앞에 선 젊은이에게 목포행 기차 타는 곳이 맞느냐고 묻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모르겠다고 했다. 갑자기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엄습했다. 딸아이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위층으로 올라와서 입구 번호를 확인했다. 2번. 맞는데. 다시 내려갔다. 전광판에 역으로 들어오는 기차 번호가 쓰여있었다. 내가 탈 기차가 아니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때 건너편 승강장에도 기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내가 타야 할 기차였다. “어떡해!” 나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딸아이의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막차를 놓칠 것 같은 생각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오히려 딸아이는 “엄마 괜찮아. 탈 수 있어.”라고 말하며 내 손을 잡아주었다. 우리는 전속력으로 대합실을 가로질러 달렸다. 반대편 입구로 나가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출발시간이 다 된 기차가 1분만, 아니 30초만 기다려주길 간절히 바랐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용수철이 튀어 오르듯 우리는 달려 나갔다. 기차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겨우 삼, 사 미터 앞. 십 초만 기다려줘도 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기차는 지각생은 태울 수 없다는 듯이 문을 닫고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야속한 기차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우리에게서 멀어졌다.
그제야 내가 다른 역과 혼동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 자주 이용했던 역과 입구의 위치가 반대인 것을 깜박 잊고 있었던 것이다. 도저히 나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한 시간이나 일찍 도착했으면서도 기차를 놓치다니. 이미 알고 있다는 교만한 생각으로 입구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나를 자책하며 나는 털썩 주저앉았다. 역무원이 내게 다가왔다. 자신의 임무에 충실한 그는 이후에 운행되는 하행선은 없으니 다른 교통편을 알아보라며 깔끔하게 내 처지를 정리해 주었다. 늦은 밤 어떤 교통편이 나와 딸아이를 안전하게 집으로 데려다줄 수 있을까.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자초지종을 말하려는데 말의 앞뒤가 섞여 제대로 전할 수가 없었다. 내 목소리가 거의 울음에 가까운 것을 듣고 남편이 말했다.
“지금 내가 출발할게. 두 시간 정도면 갈 수 있어.”
밤길을 달려 올 남편이 너무 서두르지는 않을까 불안한 마음이 들면서도, 안전한 귀가가 보장되자 내 마음이 다소 진정되었다. 대합실에서 기다릴 요량으로 의자에 앉으려는데 아까 그 역무원이 다시 내게 다가왔다. 역사 문을 닫을 시간이니 역 밖으로 나가 달라는 것이었다. 그들도 퇴근을 기다리는 직장인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나오긴 했는데 어디서 남편을 기다려야 할지 막막했다. 새벽까지 문 여는 카페도 많다던데 역 주변엔 몇몇 술집을 빼고는 다 문을 닫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어디 찾아다니기도 힘들었다. 다행히 나 혼자가 아니니 그냥 역 앞 벤치에 앉아 기다리기로 했다.
축 처진 나와는 달리 딸아이는 에너지가 넘쳐 보였다. 피곤하지 않느냐고 묻자 딸아이는 신난다고 했다. 이렇게 늦은 시간, 낯선 곳에 그것도 밖에 있는 것이 재미있다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상황을 짜증스러워하지 않고 재미있게 받아들여서 다행이었다.
“기차 놓쳤을 때 놀랐지?” 내가 물었다.
“아니, 아빠가 데리러 오신다고 해서 놀랐어. 숙소를 잡으면 될 텐데….”
“….”
그 생각을 나는 하지 못했다. 집에 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요즘처럼 묵을 곳이 넘쳐나는 세상에 오직 귀소본능에 충실해서 아이도 할 수 있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드디어 남편이 도착했다. 그는 딸아이와 나를 가만히 안아주더니 잠시 쉴 새도 없이 바로 집으로 차를 돌렸다. 날이 밝으면 출근해야 하는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넌지시 물었다.
“와이프가 모자라서 몸이 고되지?”
“….”
말없이 남편이 내 손을 꼬옥 쥐었다. 그의 따뜻한 손이 열 마디 말보다 더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