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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정희 Nov 10. 2022

대나무 숲

 며칠 전부터 한쪽 발목이 시큰했다. 그날따라 통증이 심해서 짬을 내 병원에 갔다. 열두 시가 다 되어 가는데도 진료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점심시간 전에 진료를 보지 못하면 낭패였다. 자꾸만 시계와 진료실 문 쪽으로 눈이 갔다. 내 바로 앞 순서인 사람이 진료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안심이 되었다.


 거칠게 병원문이 열렸다. 한 남자가 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을린 얼굴에 붉은빛이 도는 그는 낮술이라도 한 양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그는 대기실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큰 소리로 말했다. “원장님 있어요?”


 뭔가 사태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원무과 직원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는가 싶더니 갑자기 그의 입에서 험한 말들이 쏟아졌다. “내가 씨, 원장한테 직접 말한다고….” 사정이 이러하니 내 차례가 됐는데도 그 사람이 먼저 진료실로 들어갔다. 안에서 몇 번 고성이 오가는 것이 들렸다. 들리는 말을 종합해보면 그 남자는 발목 핀 제거 수술을 당장 받겠다는 것이고 병원 측에서는 다음 주에 하자는 것이었다. 입원실도 없을 뿐만 아니라 수술 예약이 잡혀 있어서 이번 주는 안 된다는 의사 말이 진료실 밖에 있는 나에게는 이해가 됐는데 안에 있는 그 남자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진료실에서 나온 후에도 그는 계속 거친 말을 내뱉었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불똥이 내게 튈까 봐 시선을 피하며 진료실로 들어갔다. 내 발목을 보면서도 의사는 밖의 소란에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발목 사진을 먼저 찍어보자기에 진료실을 나서는데 그 남자가 다시 들어왔다. “이 병원에서는 아무도 나를 사람 취급 안 해요!” 문을 나서는 내 뒤통수에서 그 남자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내가 보기에 그는 병원문을 들어선 이후부터 그 병원에서 누구보다도 친절한 대우를 받았다. 나를 비롯한 대기실의 많은 사람들은 그와 같은 특별대우를 받지 못했다. 원무과 직원이 나와서 응대하지도 않았고 대기 순서를 무시하고 먼저 진료를 받는 특혜를 주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왜 자신이 사람 취급을 못 받았다고 느꼈을까.


 발목뼈는 이상이 없으니 며칠 약을 먹어보라는 말을 듣고 병원을 나섰다. 약국에서 또 그 남자와 마주쳤다. 아직도 온몸에 화를 품어서 붉은 얼굴이 용광로 같았다. “씨, 어디서 사람을 버러지 취급하고 있어.” 사람대접을 못 받은 것도 모자라서 이번엔 버러지 취급을 당했다니…. 그 남자의 피해 의식이 도를 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기를 내어 그 남자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충혈된 눈망울을 끔뻑거리는 모습이 뙤약볕에서 밭 갈고 나와 한숨을 뱉어내는 황소 같기는 했으나 어디 하나 버러지를 연상시키지는 않았다.


 그가 빼내야 할 것은 발목에 있는 핀이 아니라 그의 마음에 박힌 가시 같았다. 언제부터 생긴 마음의 상처가 그렇게 모난 가시가 되었는지, 그의 가시가 자꾸만 험한 말이 되어 튀어나와 사람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몇 년 전 그녀도 그랬다. 상냥하고 따뜻했던 그녀의 첫인상과는 달리 그녀는 자주 화를 냈다. 미팅 시간에 지각을 하고도 오히려 자신을 기다려주지 않고 회의를 시작했다고 짜증을 냈다. 가벼운 농담이 오가는 대화에서 누군가의 말꼬투리를 잡아 따지는 일도 다반사였다. 그녀와 한 공간에 있는 것이 피곤하다며 그녀를 피하는 팀원들이 늘었다.


 어느 햇살 좋은 가을날, 그녀가 밝은 표정으로 출근을 했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 것으로 보아 기분이 꽤 좋은 것 같았다. 그녀의 기분이 곧 우리 팀의 분위기로 이어진 지 한참 된지라 나도 마음이 놓였다. 잠시 통화를 마치고 자리에 앉는데 그녀의 얼굴이 어느새 어두워져 있었다. 그녀의 심경의 변화가 내 눈에도 보였다. 난감한 것은 그녀가 왜 기분이 상했는지 아무도 이유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사무실 문을 꽝 닫고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에 날이 서 있었다.


 쫓아가 그녀를 잡았다. 찻잔을 마주하고 앉았는데 그녀의 눈가가 촉촉했다. 그녀의 기분이 수시로 바뀌는 것을 여러 번 본 터라 나는 섣불리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무엇이 문제인지 묻기도 망설여졌다. 그녀는 차 한 모금과 함께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그녀는 뜬금없이 남편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당황스러웠다. 그녀와 그런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눠본 적도 없거니와, 스스럼없이 조언이나 위로의 말을 주고받을 처지도 아니어서 나는 그녀의 가정사를 듣는 것이 편치 않았다. 게다가 나는 다음 일정으로 시간에 쫓겨서 마음이 바빴다. 나는 사무실에서 그녀가 왜 뛰쳐나왔는지 그것을 알고 싶었다. 내가 막 화제를 돌리려고 할 때 그녀가 갑자기 흐느꼈다.

 “이런 말 하는 내가 우습죠?”

 물론 나는 자신의 아픔을 토로하는 사람을 우습게 생각할 정도로 형편없는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의 아픔을 함께 하지 못하는 내 속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아서 흠칫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그녀가 쏟아내는 하소연을 한 시간 넘게 들었다. 멋지고 능력 있는 남편을 둔 그녀는 밖에서는 결혼 잘했다는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살고 있지만 정작 그 남편이 집에서는 자신을 무시하고 경멸한다고 했다. 그런 남편에게 받은 상처로 자신의 마음에 병이 깊다며 여러 번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자조적인 말투로 힘없이 이야기하다가도 갑자기 목소리를 높여 열을 내기도 했다. 그녀의 가슴이 상처투성이라는 것은 자명해 보였다. 그 상처들이 가시가 되어 그녀를 찌르고 또 주위 사람들을 찌르는 것 같았다.

 

 “내가 왜 여기서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한참을 쏟아내던 그녀가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녀가 별다른 친분 없는 내게 자신의 개인사를 털어놓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때로는 가까운 사람에게 보이기 싫은 아픔이 있는 것 아닌가. 하지만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그런 아픔 말이다. 그럴 땐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칠 '대나무 숲'이 필요한 것이다. 나는 운 좋게도 그날 그녀의 대나무 숲이 되어줄 수 있었다. 


 “밥 먹으러 갑시다.” 

 이왕 늦어버린 다음 일정은 뒤로 미루고 나는 그녀와 따끈한 전골을 먹었다. 


 약국에서 나오니 그 남자가 저만치 가고 있었다. 자신의 가시로 울타리를 만들고 스스로 그 안에 갇혀버린 남자, 혼자서는 도저히 그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저 길 끝에서 우연히라도 그가 대나무 숲을 발견하기를, 그래서 자신의 울타리를 걷어낼 수 있기를... 오지랖 넓은 생각을 하며 돌아섰다. 따끈한 국물이 간절한 가을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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