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울렸다. 점심시간에 학교 매점은 흡사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수업 끝 종과 함께 발휘되는 여고생들의 순발력에 매번 나는 입이 떡 벌어졌다. 나 같은 범인(凡人)은 아무리 잽싸게 뛰어나가도 앞줄을 선점할 수 없었다.
설령 운 좋게 앞줄에 선다 해도 숫기 없이 자리만 지키고 있어서는 뒤로 밀리기 십상이었다. 다리에 힘을 꽉 주고 수없는 밀침에도 버텨내는 맷집이 있어야만 빵 하나라도 집을 수 있었다. 참으로 고달픈 점심시간이었다.
도시락을 점심과 저녁 두 개나 싸가지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도시락 두 개를 챙기는 것은 여러모로 힘든 일이었다. 무거운 책가방에 도시락까지 들고 등굣길에 나서는 학생들도 안쓰러웠지만 매일 도시락을 준비하는 학부모들에게도 못할 일이었다. 게다가 두 끼를 도시락으로 해결하라는 것은 당분과 지방을 사랑하는 여고생들에겐 당최 무리한 요구였다. 뭐니 뭐니 해도 한 끼 정도는 몸에는 썩 좋지 않으나 입에는 만족스러운 단 것이나 기름진 것을 먹어줘야 포만감으로 흡족해지는 것이었다. 사정이 그러하니 도시락을 하나만 싸오는 학생들이 많았다. 나도 그랬다. 그 도시락을 저녁에 먹는 것을 나만 선호한 것은 아니었는지 점심시간마다 매점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그날도 점심시간에 매점 밖까지 줄이 길었다. 늘 있던 일인데도 왠지 그날은 내가 점심 한 끼에 목을 매는 것 같아서 기분이 상했다. 나는 줄 서기를 포기하고 근처 연못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광합성으로 배를 채울 재간도 없건만 나는 밥 대신 햇빛을 쐬고 있었다.
“여기서 뭐해?”
같은 반 친구였다. 그녀는 덩치로 보나 호방한 기개로 보나 긴 줄을 헤집고 들어갈지언정 질려 나가떨어질 인사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날은 그녀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무슨 이유에서든 그녀도 점심을 포기한 것 같아서 나는 말없이 벤치 한쪽을 내어주었다.
“내가 아까부터 여기가 아프거든.”
친구는 가만히 앉더니 자기 배에 손을 얹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엄마가 데리러 오신댔는데 좀 늦으시나 봐. 네가 교문 앞까지 같이 좀 가줄래?”
어차피 점심을 포기한 터라 어려울 것 없는 부탁이었다. 친구는 내 팔에 몸을 기대며 일어섰다.
교문은 악명 높은 수위 아저씨가 늘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학교가 끝나지 않는 한 교문을 통과할 수 있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많이 아프든지 가족이 찾아오든지 그런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야만 나갈 수 있었다. 별다른 사유가 없었던 나는 이 년 동안 학교가 끝나기 전에 그곳을 통과한 적도, 통과할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다. 그날은 아픈 친구 덕에 한낮에 교문을 나서는 희귀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매서운 눈으로 내 친구를 살피던 수위 아저씨는 거의 울상이 된 친구의 얼굴을 보며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내 팔에 매달리다시피 한 친구는 아까보다 더 아픈 것 같았다. 나도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친구의 어머니가 빨리 오셔야 할 텐데….
교문을 나선 후 한길까지 나왔다. 나는 아픈 친구를 앉힐 자리를 찾느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계속 걸었다. 그녀에게 한쪽 팔을 내어 준 나도 할 수 없이 따라갔다. ‘00우리만두’라고 쓰여 있는 간판 앞에서 친구는 내 팔에 의지하던 자신의 몸을 바로 세웠다. 그리고는 분식점 문을 열며 내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나는 친구가 어머니를 만나기로 한 장소인가 싶어서 따라 들어갔다.
친구는 자리에 앉자마자 주인에게 외쳤다.
“이모, 여기 쫄면 두 그릇 빨리 주세요.”
내 귀가 번쩍 트였다. 쫄면이라니, 생각지도 못했던 횡재였다. 시골에서 중학교까지 다닌 나는 고등학교에 와서야 쫄면이라는 음식을 알았다. 아버지가 면을 좋아하셔서 나는 어릴 때부터 국수나 라면에는 익숙했다. 면에 양념장을 얹어먹는 비빔국수도 흔히 먹던 음식이었다. 그러나 어떤 면도 그렇게 쫄깃한 식감을 주지는 못했다. 새콤달콤한 소스에 아삭한 야채까지 얹은 쫄면은 당시의 내겐 가히 맛의 신세계였다. 그런 음식을 내 앞에서 주문하는데 어찌 마다할 수 있겠는가.
배 아픈 친구가 먹어도 될지 마음이 쓰였으나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일단 젓가락을 들었다. 한입에 나는 학교 매점에서 내 기분이 상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날 내 몸은 달고 기름진 음식이 아니라 입안 가득 싱그러움이 느껴지는, 바로 그 음식을 원했던 것이다.
친구의 어머니가 오시기 전에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했다. 질긴 면을 열심히 씹으면서도 식당 문이 열릴 때마다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혹여 친구 어머니가 들어오실까 해서 드나드는 사람들을 살폈다. 나와는 달리 친구는 속 편하게 식사를 하는 것 같았다. 배 아픈 사람치고는 너무 맛있게 먹었다.
다행히 우리의 식사가 다 끝날 때까지 친구의 어머니는 오시지 않았다. 배가 부른 후에야 나는 친구에게 물었다.
“어머니는 언제 오셔?”
친구는 그릇을 말끔히 비우며 말했다.
“배가 다 나았네.”
친구는 아마도 배가 아픈 것이 아니라 고팠던 것 같다며 넉살 좋게 웃었다. 나는 그제야 그녀가 장난쳤다는 것을 알았다. 덕분에 맛난 점심을 먹은 지라 친구의 장난을 탓할 생각은 없었으나 왜 굳이 내게 장난을 쳤는지 궁금했다. 그녀는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네가 쫄면을 좋아하잖아. 오늘따라 기운도 없어 보였고….”
“…….”
답할 말을 찾지 못하는 내게 친구가 덧붙여 말했다.
“네가 혼자서 저 교문을 통과할 위인도 못되고.”
“…….”
여전히 나는 대답할 적당한 말을 찾지 못했다. 말로는 표현이 되지 않았다. 그저
배보다 마음이 더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