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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정희 Dec 09. 2022

히비스커스를 마시며


 날이 차니 물 끓는 소리가 반갑습니다. 아마도 따뜻한 차 한 잔이 그리웠던 모양입니다.


 찻잔을 꺼냈답니다. 이집트 여행 중에 샀다며 건네주던 당신의 손길이 그리웠습니다.

 “클레오파트라가 이 차를 좋아했다더군.”

 빠알간 꽃잎을 말린 차를 찻잔과 함께 내밀며 말씀하셨지요. 빛깔 고운 차를 마시며 가슴 따뜻한 그해 겨울을 보냈답니다.


 겨울이 종착지를 향해 달려가던 어느 날, 문자가 날아왔습니다.

 <부고>

 처음엔 내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답니다. 몇 년 전 그랬던 것처럼 당신에게 슬픈 일이 생긴 줄만 알았지요. 달려가 위로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문자를 다시 자세히 보았습니다. 故 000님. 부고의 주인공이 당신이었습니다.


 그 기막힘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단숨에 믿을 수가 없어서 여러 번 문자를 확인했습니다. 당신의 발인이 그날 아침이었다니, 저는 당신이 가는 마지막 모습을 영정으로조차 뵐 수 없었지요.


 어떻게 된 일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 전 주까지만 해도 밝은 목소리로 통화를 했지 않습니까. 지병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도 없거니와 뵐 때마다 단단한 버팀목이 되어주시니 저는 그저 당신이 산처럼 건강하다고만 생각했습니다.


 돌이켜보니 당신이 종종 눈을 감고 관자놀이를 지압하던 것이 떠오르더군요. 잠깐 동안 당신의 미간에 주름이 잡히곤 했지요. 그런 당신을 보면서도 저는 그저 당신이 피곤함을 느끼는 것으로만 생각했답니다. 퇴직 후 작은 땅을 일구는 재미가 쏠쏠하다며 갓 따온 호박과 상추 등을 제게 챙겨주셨지요. 염치없이 그 귀한 것을 잘도 받았습니다. 그리곤 안 하던 농사일을 틈틈이 하시니 고단하신가 보다 했습니다. 당신의 사인이 심장마비였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야 당신의 미간에 잡히던 주름이 예삿일이 아니었음을 알았습니다.


 당신의 인품을 좋아해서 본받고 싶었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저는 당신에 대해 아는 것이 없더군요. 다시 볼 수 없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어서일까요. 아니면 상대방을 존중하는 마음이 커서였을까요. 우리는 서로가 굳이 꺼내지 않는 말을 채근하여 물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당신의 생각과 가치관을 듣는 것으로 저는 족했습니다. 그 이상 당신에 대해 무엇을 물어볼 필요를 느끼지 못했지요. 하지만 당신의 부고를 삼일이나 지난 후에 받고 보니 혼란스러웠습니다. 제가 당신을 존중했던 것인지 아니면 그저 무심했던 것인지 말입니다.


  당신이 더 이상 이 세상에 안 계신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습니다. 장례식장에서 고인에게 꽃 한 송이 올리는 것이 그저 마지막 인사를 드리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남아있는 사람에게도 이별을 받아들이는 의식임을 당신을 보내며 알았습니다.


 안개꽃 한 다발을 샀습니다. 그리도 청초하니 어떤 꽃과도 어울리는 것이겠지요. 생전에 당신이 노란 프리지어를 들고 환하게 웃으시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꽃집에 안개꽃이 없어서 함께 사지 못했다고 아쉬워하시기에 제가 사드리기로 약속했었지요. 당신이 떠나신 후에야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당신을 뵈러 추모공원을 찾아간 날, 눈송이가 드문드문 날리더군요. 마치 당신이 어서 오라고 반기는 것만 같았습니다. 환하게 웃고 있는 당신 사진 앞에 꽃다발을 들고 섰습니다. '어서 오소!' 당신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습니다. 오느라 애썼다고 당장이라도 제 어깨를 다독여줄 것만 같았지요.

 "여기 계시면 어쩝니까!"

 그제야 당신이 떠나셨다는 것을, 정말 가버리셨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당신 옆에 웃고 있는 꼬마 숙녀의 사진이 있더군요. 당신이 보여주셨던 영상 속에 작은 아이였습니다. 좀처럼 개인사를 내보이지 않던 당신이셨지만, 손녀의 재롱만큼은 숨기지 못하고 자랑하셨지요. 사랑하는 손녀를 남겨두고 어찌 그리 먼 길을 떠나셨는지요.  


 당신을 그곳에 두고 돌아서 나오니 하늘은 어두워지고 강한 눈발이 날리고 있었습니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서 한참 동안 눈을 보며 서 있었습니다. 당신이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긴긴 문자를 당신의 폰으로 보냈습니다. 당신의 사진 앞에 섰을 때는 한마디도 나오지 않던 말이 글로는 어찌 그리 쏟아지던지요.


 돌아오는 길, 조그만 찻집에 들렀습니다.

 "히비스커스 두 잔 주세요."

 맞은편에 당신을 위한 차 한 잔을 놓아두고, 저 혼자 차를 마셨습니다. 맛과 향이 당신을 닮아서일까요. 시리던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당신의 간결하고도 위트 있는 답장을 더는 기대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앉아있는 내내 자꾸만 폰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역시나 답은 없었지요.


 식은 찻잔을 두고 일어섰습니다. 찻집을 나오려는데 곱게 말린 빠알간 꽃잎이 작은 주머니에 담겨있더군요. 당신을 본 듯 반가웠습니다. 당신의 손을 잡듯 그 주머니를 사들고 나왔습니다.


 당신이 생각나는 날에는 히비스커스를 마십니다. 여전히 마음이 따뜻해지지요. 제 삶의 한 페이지를 함께 해주신 나의 선생님! 오늘따라 당신이 더욱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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