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나들이를 나왔다. 며칠 전 보았던 노란 개나리는 오간 데 없고 파릇한 잎들이 꽃의 흔적을 지우고 있었다. 긴 세월 기다려 잠시 세상에 나온 꽃이건만 무심히 보낸 것이 내심 미안했다.
저만치 가게 앞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막대를 하나 집어 들고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지나는 길에 들으니 아버지는 사자하고 아들은 안된다 하며 서로 양보할 기미가 없었다. 슬쩍 들여다보니 가는 막대에 ‘사랑의 매’라고 쓰여있었다. 문득 그 아이가 떠올랐다.
인영이는 근방에 모범생으로 칭찬이 자자한 아이였다. 중학교 3학년인 인영이는 또래에 비해 예의 바른 품성을 지녔을 뿐 아니라 귀티 나는 외모까지 더해 여학생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아이 엄마의 자식 사랑이 극진하다느니, 그 아이를 맡은 선생님이 자주 바뀐다느니 하는 말들이 주변에서 들렸다. 인영이를 만족시킬 선생님이 없을 만큼 아이의 실력이 대단한가 보다, 역시 엄마의 사랑과 관심이 아이를 잘 자라게 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런 아이를 만난다니 내심 기대로 마음이 부풀었다. 인영이를 만나러 집으로 갔다. 초인종을 누르자 대답 없이 문이 열렸다.
“…….”
예상과 전혀 다른 눈빛이 나를 맞았다. 인영이의 밝은 얼굴을 기대했으나 나를 맞은 사람은 무표정한 인영이의 엄마였다. 은 테두리 안경 너머 가늘고 예리한 눈매가 나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쭈욱 훑어 내려갔다. 그녀의 적나라한 눈빛에 부풀었던 내 마음이 쪼그라들었다.
인영이는 엄마의 감시 아래 순종하며 일상을 살고 있었다. 인영이를 볼 때마다 내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평온을 유지하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인영이의 잔잔한 내면에 돌을 던지고 싶지 않아서 꾹꾹 참았다. 인영이의 방 한쪽에 막대기가 하나 서 있었다. 막대의 한쪽에 ‘사랑의 매’라고 적혀 있었다. 인영이에게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긴 겨울 끝, 세상이 다시 기지개를 켜는 이른 봄이었다. 두툼한 외투 대신 가벼운 재킷을 꺼내 입고 인영이를 만나러 갔다. 아이의 표정이 전에 없이 어두웠다. 한낮이긴 했지만 불 꺼진 인영이의 방이 유난히 어둡게 느껴졌다.
“불 켤까?” 내가 물었다.
“아니요, 놔두세요.” 평소와 다르게 인영이의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말없이 앉아있는 인영이를 나도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미 무언가로 마음에 상처가 난 아이에게 그깟 공부가 뭐 그리 대수랴.
정적이 흐르는 인영이의 방문이 벌컥 열렸다. 어머니였다. 그녀는 다짜고짜 인영이에게 달려들더니 뺨을 내리쳤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나는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인영이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엉거주춤 서 있었다. 어머니는 내 존재를 아는지 모르는지 이성을 잃은 채 마구 팔을 휘둘렀고 인영이는 대책 없이 맞고 있었다. 이유야 어쨌든 아이를 폭행으로부터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
날카로운 내 외침에 그녀는 멈칫했다. 그제야 내가 눈에 들어온 건지 그녀는 인영이에게서 한발 물러섰다. 부모자식 간의 일이니 내가 함부로 중재자로 나설 수는 없었다. 방 한쪽에 서 있는 사랑의 매를 어머니에게 내밀었다. 체벌에도 예의를 갖춰야 하는 것 아닌가. 무자비하게 손을 휘두르지 말고 차라리 매를 들어 손바닥이든 종아리든 때려주기를 바랐다. 적어도 맞는 사람의 자존감이 무너지지 않기를 바랐다.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그녀는 방을 나갔다. 인영이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어깨만 들썩이고 있었다.
“인영아, 선생님이 같이 있어 줄까 아니면 가 줄까?”
사춘기 소년이 남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고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을까 싶어서 물어보았다.
“가 주세요.”
등을 몇 번 토닥여주고 나는 인영이를 두고 나왔다. 인영이의 말을 들어주고 아이가 숨을 쉴 수 있게 다음번에는 밖에서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날 밤 인영이에게서 문자가 왔다.
‘선생님, 저 공부 그만할래요.’
인영이의 선생님이 자주 바뀐 것은 인영이 때문이 아니었다. 그 극진하다는 어머니의 예의 없는 사랑 때문이었다.
가게 앞에서 실랑이를 벌이던 아버지와 아들은 결국 사랑의 매를 놓고 돌아섰다. 매 맞을 일이 없어져서일까. 아버지를 쫓는 아이의 발걸음이 가벼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