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른 독립을 추천하는 입장에서
서울과 부산은 한국을 대표하는 도시들이다. 여행지로도 그렇지만 토박이로 태어나 이동없이 사는 사람들도 정말 많다. 나의 대학교 친구들 중 부산에서 태어나 대학교를 나와 직장을 잡고 여전히 부모님과 지내는 친구들이 있다. 서울에서의 직장동료들도 그런 분들이 더러 있었다. 군대를 갔던 21살 기준으로 쭉 밖에서 나와살았던 나는 그들과 달랐다. 지금와서 돌아보면 주거비, 생활비 등 많이 들었지만 거기서 얻은 삶의 태도와 지혜는 그 이상의 가치라고 생각한다.
부산의 대학교에 들어갔을 때는 부산에 사는 친구들이 정말 부러웠다. 통학도 짧고 자취비용도 안드니까. 밤 10시, 막차타고 겨우 집에 도착해도 부산에 있는 친구들이 먼저 집이라는게 억울하기도 했다. 서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보증금에 월세 60을 내고 사는데 누구는 공짜로 부모님 집에 산다. 심지어 집도 훨씬 좋다. 억울하다. 서울에서 태어나는 것도 스펙이라고도 한다. 부산에서, 아니 대도시에서 태어나는 것도 운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교육이며 의료며 인프라가 충분한 곳이면 누군들 평생 거기에 붙어있고 싶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동네친구들까지 있다면 거주지 이동은 더 어려운 결정이 된다.
나는 늘 다른 이들에게 꼭 혼자 살아볼 것을 추천했다. 자취를 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들이 몇가지 있다. 생필품이 얼마나 비싼지 요리하는게 얼마나 힘든지 집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등 경제적 생활적인 면도 크다. 당연하게 바꿔져있던 샴푸, 바디워시가 생각보다 비싼 것을 깨닫는 건 첫날이면 충분하다. 또 밈처럼 고춧가루가 이렇게 비쌌다고?하는 게 있지만 모든 조미료나 재료가 생각보다 비싸다. 가격대는 어찌나 다양한지 싼건 애매하고 비싼건 좀 그렇고... 늘 고민의 연속이다.
허나 내가 늘 전달하고 싶은 것은 정신적인 문제이다. 평생 같은 나라, 도시에서 산다면 큰 문제는 아닐 수 있겠지만 우리는 결국 나가야 한다. 그게 부모님과 사는 집이라도. 익숙했던 것들이 사라지는 순간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따라온다. 그게 물건일 수 있고 사람일 수 있다. 개인적이지만 사람일 때가 더 힘들었다. 더이상 주변에 친구가 없다는 것을 느끼면 세상에 혼자 떨어진 느낌을 받을 지도 모른다. 사교가 익숙한 성격이면 다르겠지만 내향인인 나에게는 그것이 가장 큰 힘듦이었다.
대학교 기숙사를 제외하고 처음으로 혼자 지낸 것은 첫 부산회사의 기숙사였다. 해운대구, 반짝거리는 곳이 아니라 저기 어디 공장단지 안에 있는 회사였다. 아마 그 때 나는 우울증같은 것으로 생각된다. 직사각형 컨테이너같은 방에서 매일 밤을 눈물을 흘리며 몇 달을 보냈다. 이유모를 외로움이 온몸을 지배했고, 회사생활도 인간관계도 어느 것 하나 잘 되지 않았다. '분명 혼자서 게임도 하고 책도 보고 돌아다니면서 잘 지냈는데, 왜 그러지? 나는 달라진 게 없는데' 해결책을 모르니 매일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밤이었다. 그렇게 죽지 못해 살던 중 아는 형에게 연락했고 치킨집에서 만나 하소연하며 눈물 젖은 치킨을 먹었다. 그가 말해준 것은 하나였다.
"사람을 만나라!"
그 말을 시작으로 미친듯이 모임을 나가기 시작했다. 어울리지도 않는 술모임도 사교모임도 나갔다. 그러던 중 독서모임이 나에게 맞다는 걸 알고 다른 모임은 일절 그만두고 독서모임만을 하게 되었다.
서울에서도 비슷했다. 이사한 첫날 8월 14일이었다. 다음날은 광복절로 쉬는 날이라 혼자서 하루를 보내야 했다. '드디어 서울라이프가 시작되는구나! 내일 앞에 공원도 가고 장도 봐와서 요리도 해야지. 자리 좀 잡으면 다시 독서모임도 찾아봐야겠다.' 야심차게 다짐하고 다음 날 아무것도 못했다. 집은 풀지 못한 이삿짐이 쌓여있었다. 좀이따 치워야지하니 저녁이었다. 문득 가슴 깊은 곳에서 부산의 안좋은 기운이 올라오는 듯했다. 위기를 느꼈다. 내 인생의 그래프가 있다면 저기 밑으로 가려하는 기운을 감지한 것이다. 다행히 해결책은 알고 있었다. 다음 날 바로 독서모임을 찾았다.
내 인생의 바닥이 언제였는지 아는게 중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이겨냈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주식에만 변동이 있는게 아니라 사람의 육체도 마음도 변동이 있다. 어떨 때는 떨어지고 갑자기 올라가기도 하고 그런다. 나의 가장 밑바닥은 처음 혼자 느꼈던 외로움이다. 그 것을 이겨낸 것은 내 이전 삶에는 비중이 거의 없던 사람이었다. 미친듯 힘든 기억이지만 운이 좋은건 어렸고 주변에 좋은 사람이 있었다. 그로 인해 이후에 그런 패턴을 느낄 때면 나만의 정답지를 꺼내쓸 수 있었다. 항상 100점은 아니지만 적어도 70점은 넘는 정답이다.
지금도 종종 비슷한 이유로 사회생활 이후의 힘듦을 물어오는 친구들이 있다. 열심히 들어주고 나는 나의 경험을 이야기해준다. 나도 나의 정답을 알 뿐 그들의 답은 모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