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묘염 Aug 12. 2023

(독서)당신이 모르는 민주주의

마이클센델   

이런 종류의 책들이 기대하는 감정은 무엇일까? 마이클샌델의 다른 책 ‘공정하다는 착각’ ,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었을 때는, 그냥 뭔가를 배운다는 느낌, 지식인의 통찰력과 지성에 대한 감탄, 그저 책을 읽고 고개나 끄덕일 뿐이면서도 내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만 같은 자기기만,  뭔가 더 나은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남았다. 하지만 이번에 ‘당신이 모르는 민주주의’를 읽고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슬픔이었다. 

 내가 노예로 태어났다는 사실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아주 냉정한 시선으로 확인시켜 주는 내 위치가 아주 서글펐다.  

 나는 안일하고 나태한 사람이고 현실에 안주하는 것은 나의 도피이자 행복의 비결이다. 하지만 이 도피와 자기기만 위에 부실하게 세워진 모래성 같은 현실이 그저 누군가가 베푼 자비의 결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노예고 노예는 자기 삶에 대해 결정권이 없으니까.        

 

 이 책은 제목을 너무 잘 지었다.  여태 내가 알고  있던 민주주의는 뭐였나 하는 의문이 절로 떠오른다. 민주주의는 처음 만들어졌을 때부터 지금까지 너무나도 많이 변했고, 지금은 처음 목적과 가치는 아예 사라져 버린 것처럼 보인다.  지난달에 읽었던 ‘자본주의’ , ‘한국의 유교화 과정’과 놀랍도록 연결되는 책이다. 한국의 유교화과정에 나왔던 조선의 엘리트들, 그들로부터 맥을 이어온 한국 특유의 엘리트집단들, 그리고 자본주의에서 세상을 이끌어가는 소수의 집단, 그와 대비되는 나머지 다수의 비참한 대중. 결정하지 못하는 자. 끌려가는 자들. 당연히 후자에 속하는 내가 몰랐던 민주주의의 의미에 관한 이야기다.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기만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앞으로 우리에게 닥칠, 어쩌면 끔찍할 미래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한국의 유교화 과정을 읽으면서, 왜 노비여성은 자신의 신분을 그대로 물려줄 것을 알면서도, 아이를 낳아야만 했나.라는 생각을 했었다.  당신이 모르는 민주주의를 읽으며 질문을 바꿨다. 나는 왜 아이를...     

마이크 셀덴이 이야기하는 것은 미국의 민주주의와 그 변천사, 처음의 미국이 말하던 민주주의와 지금에 와서 바뀌어버린 민주주의의 의미. 도대체 이 절망적인 현실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지만, 그건 비단 미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이고, 지금  내가 사는 사회를 생각하면 너무나 맞아떨어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차이가 있다면, 미국 초기의 민주주의. 자치와 정의, 옮음과 철학이 다투던 그 시기의 민주주의 담론을 우리는 경험해 본 적 없다는 것 정도다.  민주주의 제도 자체를 쟁취하기에도 피가 터졌던 역사였고, 그  과정에서 옳음과 철학과 자치와 민주주의의 의미와 정의에 대해 논하기엔 , 철학과 고민으로 진보와 보수가 형성되기엔 우리는 너무 화려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전쟁이 없었다면, 빨갱이네 아니네로 서로의 이익을 변호하기 급급하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현재가 좀 더 나았을까? 아닌 것 같다.  미국은 트럼프를 뽑았고 우리는 이미 우리의 트럼프를 뽑고 뽑고 뽑고도 계속 뽑고  앞으로도 뽑을 것 같으니까.       

4년에 한 번씩 부르짖는 민주주의와, 선거권과 주권이 어쩌고 하는 공허한 울림이 늘 웃기고 있고 민망하기만 한 일처럼 여겨졌는데 (실제로도 웃기고 민망한 일일 뿐만 아니라 기만적이고 위선적인 일이기도 하다.)  4년에 한 번 하는 그 대형쇼의 결과는 우연이 아니다. 미국에서 쌓여왔던 모든 문제와 불만과 갈등이 쌓인 결과 트럼프가 당선된 것처럼, 망가진 시스템과 공동체의 상처에서 선거 결과가 나온다.  그 결과는 해가 갈수록 모든 나라에서 점점 참담해지고 있고 이대로가 다간 어떻게든 결단이 날 것만 같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하는 책이다.  

 

 내가 내 아이에게 노예의 신분을 물려주는 것도 모자라, 끔찍한 시스템과 미친 지도자들과, 종래엔 폭력과 전쟁까지 물려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무력감이 느껴진다.       

호레이스 만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보편적 참정권 아래에서 누구나 정치에 참여할 수 있으려면 누구나 인격적으로나 지적으로나 또 도덕적으로 높은 수준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보편적’인 잘못된 정치와 재앙이 뒤따른다”  

그래서 그런 수준을 가진 시민을 양성하는 것이 초기 휘그당의 목적이었다는 거다. 휘그당은 공화당의 전신이고 시민들의 도덕성과 시민적 덕목을 개선하여 공화주의 정신을 드높이겠다는 목적으로 추진한 사업이 바로 공립학교였다는 거다.   

 우린 어떤가 생각해 봤다. 지금 공립학교의 교사들은, 최소한의 교권과 교사의 안전을 지켜달라며 땡볕에 검은 옷을 입고 거리에 앉아, 이미 보호받지 못하고 죽어버린 교사의 죽음을 추모하고 있다. 어떤 젊은 정치인은 성차별을 자신의 입신을 위해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약자를 혐오한다. 그리고 그것을 아이들에게 교육해야 한다 주장한다. 성평등을 다룬 책들은 도서관에서 빼달라는 민원이 빗발치고, 이동권을 주장하는 장애인들은 불편하니까 한가할 때 보는 사람 없는데서 시위하라며 폭력적인 언행을 일삼는다. 이미 ‘인격적으로나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높은 수준을 갖추는 데’ 실패한 시민들의 민주주의는 어느 방향으로 개선해야 하는지 불행하게도 이 책에선 알려주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 진리처럼 알려진 자발주의적 자유에 대해서도 시작은 달랐다. 

[자발주의적 자유는 언론의 자유, 종교적 자유, 배심재판, 투표권 등과 같은 시민적 정치적 권리들만 존중할 것을 요구할까? 아니면 교육, 고용, 주택, 의료 등에 대한 권리처럼 특정한 사회적 경제적 권리도 요구할까 266p]

[시장경제에서 어떤 사람은 성공하고 어떤 사람은 실패하게 만드는 재능과 자질이 개인에게 분배되는 것은 “도덕적 관점에서 임의적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로 존중한다는 것은 운명의 임의성을 보상하는 권리 및 특별지원혜택을 보장하는 구조의 필요성을 의미한다 279p]  하는 고민이 그때엔 있었다.  지금은 그런 고민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지금은 자발주의적 자유와 능력주의가 서로를 분간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 같다  

[자신이 거둔 성공이나 실패가 오로지 자신이 잘나거나 못났기 때문이라고 사람들이 믿도록 장려할 때, 승자들은 오만해지고 뒤처진 사람들은 굴욕감에 휩싸인다. 이것은 공적삶을 치열한 경쟁이 펼쳐지는 경주의 이미지로 바라보는 사고방식을 강화한다. 그래서 승자는 시장이 자신들에게 주는 보상을 , 패자는 그 운명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370-371p]

[이쯤에서 막스베버가 했던 말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운이 좋았던 사람은 자기가 운이 좋았다는 사실에 만족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는 자기가 그 운을 누릴 권리가 있음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그는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또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그것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확신하고 싶어 한다. 또한 그는 불운한 사람들 역시 그 불운이 그들이 감당해야 할 당연한 몫이라고 믿길 바란다”]     

그래서 우리의 상황은 이렇게 된 것 같다  

[널찍한 교외든 빽빽한 도심이든 집이라는 공간은 먹고 자고 텔레비전을 보는 장소에 불과한 경우가 너무도 많다. 사람들이 가깝게 모여 산다고 해서 공동체가 아니다. 우리는 많은 곳에서 살지만 어디에도 살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295p]     

마이클 셀덴이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은 아마도 이 부분인 것 같다 

[도덕적으로 다툼의 여지가 있는 질문들을 공적 토론에서 배제한다는 것은 그 질문들에 대한 결론이 최종적으로 내려지지 않은 채로 내버려 둔다는 말이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부유하고 힘 있는 사람들이 관리하고 지위하는 시장들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결정하도록 방치한다는 뜻이다. 389p]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집필하지 못한 원고 중 ‘진보의 미래’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집필하지 못해서 거의 메모 수준의 책이었지만, 그걸 읽다 보면 노무현 전 대통령이 퇴임 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실질적인 시민의 참여였다. 모든 것들, 진짜 중요한 것들, 정책이 되는 것들 결정을 내리는 것들에 대해서 시민들이 단체를 조직하고 공론화를 하고 시민단체가 중심이 되어서 실질적으로 참여하고 결정하는 민주주의 사회. 그것이 진정한 민주주의고 꼭 그렇게 해야만 모든 폭력적인 자본으로부터 거대한 기업들로부터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다는 의미였던 것 같은데, 나로서는 그 실질적인 방법이나 절차적인 것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마이클센덴의 ‘당신이 모르는 민주주의’와 맞닿아 있는 문제의식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가능할까. 마이클센델이 쭈욱 나열한 것처럼 현재의 이 모든 암울한 상황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바꾸는 게 가능할까? 지구가 기상이변으로 들끓고, 더위에 미친 자들이 속출하고, 세상은 점점 창피와 수치를 모르고, 누굴 죽인다는 둥, 앞으로 죽이겠다는 둥 실제로 죽이는 둥 찌질한 장난질로 공권력을 낭비하는 지능이 실재 하는데 , 실제로 러시아는 전쟁 중이고, 북한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는데, 우리가 아직 늦지 않았을까? 늦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게 어떤 사회적 신분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뭔가를 바꿀 수 있고 좋은 방향으로 바뀔 수도 있다는 희망이 있는 사회라면 좋겠다.            

작가의 이전글 7월에 읽은 책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