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다 나를 잘 아는 존재
23.08.15 아주 사소한 일기.
애를 재우고 나오니 10시 반이었다. 남은 소중한 시간을 뭘 할까 생각했는데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사실 떠오르는 일 중에 특별히 가치 있다는 생각이 드는 일도 없었다. 그 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래봐야 기껏해야 책을 읽거나 일기를 쓰거나 티브이를 보는 건데 차라리 잠이나 자는 편이 노화의 가속을 좀 줄여볼 수 있는 생산적인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중 가장 하기 싫은 일이 자는 것이어서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넷플릭스를 훑어봤다. 뭘 볼까. 가벼운 거 뭐 재밌는 거 없나. 어제 사놓은 대용량 커피땅콩이 있어서 그걸 하나씩 입에 던져 넣으며 검색을 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한 시간이 지났다. 여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그 한 시간 동안 내가 알게 된 사실은, 어쩌면 커피땅콩이 사람을 죽일 수도 있겠다 하는 깨달음이다. 혓바닥이 얼얼한 게 드라이아이스라도 핥은 것 같다.
넷플도 보고 웨이브도 뒤졌지만 흥미를 끌만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재밌다고 소문난 건 이미 본 거거나, 보기 싫거나, 저런 건 왜 보는가 싶은 것들이었다. 흥미로운 게 딱 하나 있었는데 바로 '주인장님이 좋아할 만한 드라마' 목록이었다. 놀랍게도 다 좋아했던 드라마거나 좋아할 만한 드라마였다. 평소에 별로 많이 보지도 않는 사이트가 이렇게 내 취향을 정확히 맞추다니. 그렇다면 이걸 취향이라고 할 수 있나. 나는 나와 비슷한 수많은 사람들의 평균을 낸 존재일 뿐 아닌가. 인간은 아주 개별적이고 유일한 존재라고 하지 않았나? 사람에게는 개성이라는 것이 있고, 그래서 이 세상에 나와 같은 인간은 없는 단 하나의 존재들이라 하지 않았었나? 그렇다면 내가 봤던 이 몇 개의 작품들에서 나의 취향을 뽑아내 적나라하게 전시해 놓은 알고리즘이란 존재는 뭘까? 알고리즘 새끼가 훌륭한 건가, 아니면 취향은 환상에 불과한 걸까. 어쩌면 나와 같은 것을 좋아하는 수많은 인간들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하며 자신의 존재를 과신하고 있는 걸까? 뭐가 되었건 이 알고리즘은 맞닥뜨릴 때마다 아주 불쾌하다. 유튜브 뮤직이 추천해 주는 음악들이 너무나 마음에 들 때, 평소 유튜브로 영상을 거의 보지 않는 내 계정에 온통 카봇과 캐치티니핑으로 도배된 내 아이의 취향이 진열되어 있을 때, 사실 좀 섬뜩해진다.
소파에 절반쯤 누워 리모컨을 돌리던 그 시절에 비해 같은 자세로 넷플릭스를 훑어보는 지금은 뭐가 좀 나아진 걸까? 차라리 제한된 범위에서 대충 리모컨을 돌리다가 최선 아니면 차선 아니면 차악을 선택해서 냅다 몰입하던 그때가 선택의 폭이 더 넓었던 것은 아닐까? 내가 볼 프로를 내가 선택하고 있다는 거대한 착각이, 어쩌면 내가 원하지 않는 나를 내가 선택했다는 최종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닌가 싶어진다. 어쩌면 그런 것조차 미처 느낄 새도 없이 떠밀리듯 무언가가 되어 있을 것만 같다. 내가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라는 것이, 또 내 다음에 내 아이의 삶이 이어져 있다는 것이, 그걸 두렵게 한다.
대체 어떤 식의 교육이 이 모든 것들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어른으로 성장하게 만들 수 있을까?
괜히 소중한 휴일 밤을, 아니 그러니까 먼저 가신 분들이 남겨주신 독립된 조국에서 광복절의 밤을 넷플릭스나 뒤적이며 보내다가 알고리즘의 습격에 혼자 소름 끼쳐 한 후, 결국 쓸모없는 나 자신을 못 견뎌 하며 오랜만에 애꿎은 리모컨이나 하염없이 눌러댔다. 과연 광복절 밤인지라 새로운 프로들이 많이 하고 있었다. 다큐 같은 프로를 하고 있길래 멈춰서 봤다. 제목은 코코 순이였고, 내용은 위안부와, 역사를 왜곡하는 사람들?(중간부터 봐서 정확하진 않다)에 대한 거였다. 웬 정신 나간 극운지 극 친일인지 뭔지 ( 뭐 그런 사람이야 어디에나 있으니까) 미국인 할배가 하나 나와서 개쌉소리를 해대며 소녀 동상의 머리에 비닐을 씌우고 조롱을 했고, 그 장면 직후 아주 지적으로 보이는 미국인 여성 한 명이 나와서 "오, 그는 아주 역겨워요. 한 가지 괜찮은 점이 있다면 적어도 대학에서 가르치진 않는다는 거죠"라며 그 할배를 우아하게 디스 하는 영상이 나왔다.(이런 사람도 어디에나 있다) 그러니까 거기가 미국이든 어디든 어디에나 그런 떨어지는 인간이 있고 그 떨어지는 인간을 이용해먹는 비열한 인간이 있고 거기에 이용당하는 더 떨어지는 인간이 있고, 또 그런 인간을 역겨워 하는 인간이 있고, 또 그에 대해 반박하거나 진실을 규명하는 인간이 있으며 그런 영상을 보며 한심해하거나 화를 내거나 공감을 하거나, 뭐 나름대로의 반응을 보이는 나 같은 인간이 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새로울 것이 있느냐는 거다. 사람이 정말로,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독립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존재이며, 세상에 유일한 개별적인 존재가 맞는 걸까? 이 모든 취향과, 이 모든 덜떨어짐과, 이 모든 역겨움과 거기에서 역겨움을 찾아내는 소소한 지성과, 그나마 좀 덜 역겨운 점을 찾아내는 자조적 유머와, 옳고 그름을 분간한다고 믿는 (그 할배조차도 자신이 옳다고 믿고 있었다.) 확신 같은 것들이, 모두 실재하는 걸까 아니면 거대한 허구일까?
이 모든 것에도 내일 출근은 실재하는 것이 맞으므로 자야겠다.
알고리즘아 니가 아무리 나대봐라, 나 대신 잘 수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