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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묘염 Sep 01. 2023

8월의 책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유시민) - 애초에 문과 남자가 어쩌고부터 학력고사 세대의 묵은 향이 나지만 압권은 그 옆에 당당히 적힌 부재다.
‘나는 무엇이고 왜 존재하며 어디로 가는가?“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란 나는 무엇이고 왜 존재하며 어디로 가는지를 탐색하는 과정인가 보다. 하기야 그렇지 않은 게 어디 있겠나. 그게 뭐건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은 결국 나는 무엇이고 왜 존재하며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나름의 답변일 수밖에 없지 않나 싶었다. 사실 과학은 이용당했을 뿐이다. 과학을 도구로 사용한 인문학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하필 도구로 사용한 게 과학이라, 과학 용어와 설명이 나올 때마다, 집중력이 흩어졌다. 이 책에서 나누는 기준으로 나를 분류해 보자면, 나는 뭐랄까.... 문과 가 사람으로 태어나면 그게 바로 나다. 나는 이 책에서 그 질문의 답을 찾지 못했다. 아마도 유시민 작가님은 찾으신 것 같다. 지적 호기심, 혹은 지적 열망 혹은 뭐 지적 허영, 그게 무엇이든, 관심분야의 확장이 본인의 기존 지식들과 얽히고 확장되고 통합돠는 과정에서 희열을 느끼는 지식인의 유능함을 느꼈다. 그것이 나의 유능함으로 이어진다면 좋겠지만.... 아는 범위가 다르니 통합되고 확장되는 범위는 더욱 달라져서, 그저 지성의 격차만 느꼈을 뿐이다.
 
한국의 유교화 과정 – 저번달에 읽었던 ‘열녀의 탄생’과 시너지를 일으키는 책이다. 두 권을 다 보고 나니 인간의 찌질함과, 그 찌질함을 위한 치밀함이 모두 혐오스러워진다. 혐오하라고 쓴 책은 아니고 그냥 학술서인 것 같은데, 사실 현실보다 더 혐오를 부추기는 것은 없다. 예나 지금이나.
 
당신이 모르는 민주주의 –이건 따로 감상문을 쓴 것 같아서 패스
 
전쟁과 평화( 톨스토이)–대망의 전쟁과 평화를 이 주간의 대장정 끝에 끝장냈다. 전쟁과 평화라는 제목이 맞는지 모르겠다. 그보다는 ‘실재하는 전쟁과, 마음의 전쟁 ’ 혹은 ‘실존적 전쟁과 철학적 전쟁’ 혹은 ‘전쟁론’ 정도가 더 잘 어울릴 것 같다. 전쟁 중에도 일상이 있고, 생물학적 목숨과는 또 다른 철학적 실존이 있다. 실재 물리적 전쟁이 아니라도, 인간은 나름의 전쟁을 치르고 있고 때론 승리하곤 때론 패하면서 성장하기도 하고 스스로를 파괴하기도 한다. 실재의 역사와 어우러진 개인의 이야기를 대서사시처럼 풀어낸 듯한 스케일의 소설들은 늘 존경심을 자아내곤 한다. ( 이런 대작들을 불 때마다 마음속으론 늘 내 마음속의 대작 ‘토지’를 떠올리는데, 나한텐 그 어떤 책도 토지를 능가하진 못했다. 박경리 만세) 하지만 전쟁과 평화를 보면서 특정 신분이 아닌 사람들, 특히 귀족이 아닌 사람들에 대해 무척 피상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 어떤 위대한 사람도 본인의 시대를 벗어날 수는 없다지만 내 시대에서 나의 지위를 생각해 보자면, 한 사람의 개인으로 가 아니라 피상적 집단의 일부로, 전혀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고 싶지 않고, 이해할 필요도 없는, 무지몽매한 집단적 존재로 그려질 것이 분명한 나 자신의 처지가 서러워졌다. (경리님은 안 그러셨다. 톨스토이백작!) 물론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그는 그 시절과 그 계층의 인간들로, 소설 속에 하나의 커다란 사회를 창조해냈고, 2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책 속의 인간 군상들을 보면서, 200년 후의 독자가 그에 상응하는 어떤 인간들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가장 위대한 점이다. 인간에 대한 이해(그게 계층에 대한 이해는 아니더라도) 가 지금까지도 세상이 그에게 박수를 보내는 유일한 이유다.
 
[내세의 불가피함을 믿게 하는 것은 논거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함께 손을 잡고 인생을 나아가다 갑자기 그 자리에서 어디에도 없는 곳으로 사라지는 것, 그래서 그 앞에 서서 멈춰 서서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이라고 말하려던 것뿐이야. (2권 237p) ]
[ 세상이 존재하고 인간이 서로를 죽이게 된 이래 이런 생각으로 스스로를 진정시키지 않고서 동족들에게 범죄를 저지른 인간은 이제껏 단 한 명도 없었다. 그 생각이란 바로 공익, 즉 타인을 위한 가상의 행복이다 3권 680p]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벵하민 라바투트) - 아름다운 책이다. 5개의 단편이 있고, 그 단편이 교묘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인물들은 모두 역사 속에 실존하는 인물이고, 이름을 들으면 우리가  알법한 인간들, 혹은 잘은 모르지만 인류에게 큰 영향을 준 인물들이 분명하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짜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모르게 사실과 허구가 섞여서 묘한 긴장감을 준다. 특히 두 번째로 실린 ‘슈바르츠실트 특이점’ 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책에 쓰인 그 모든 과학과 수학과 뭐 알 수도 없는 물질들에 대해선 입을 다무는 편이 나을 것 같다. 그냥 인물들에, 인물의 감정에 초점을 맞춰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빠져드는 책이다.
[돌아올 수 없는 지점, 한번 넘으면 무지막지하게 끌려들어 갈 수밖에 없는 한계에는 어떤 표시도 경계 또 없다고. 그 선을 넘는 사람은 희망을 가질 수 없다고. 모든 가능한 궤적이 돌이킬 수 없이 특이점으로 이어지기에 그들의 운명은 정해져 있다고. 슈바르츠실트가 눈에 핏발이 선 채 물었다. 그 문턱의 성질이 이렇다면 우리가 이미 그 특이점에 들어섰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숲과 별이 만날 때 (글랜디 벤더라)-뭐랄까, 미국적 신파? 영화에서 많이 보는 미국적인 정의와 휴머니즘이라고 해야 되나? 따뜻하고 그럭저럭 흥미롭고 재밌어서 하루 만에 다 읽게 되지만  통속 영화 한 편을 보고 난듯한, 나른함이 몰려오는 기분이었다. 어려움에 처한 외로운 아이와 아이의 보호자를 자청하는 꼬마 지킴이들이 나오는 수많은 영화들이 떠올랐다. 잘 만들어지면 레옹이지만 대부분 레옹이 아니다. 절묘하게 과속스캔들 같기도 하고, 이상하게 캔터키프라이드치킨을 외치고 싶기도 하고 그렇다고 그렇게 나쁘다고는 할 수 없는 희한한 소설이었다. 다시 볼 것 같진 않지만 딱히 읽은것이 후회되는 것도 책은 아니었다. 시간 때우기에 아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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