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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밋 Nov 16. 2023

디자이너에 대한 고정관념

<도대체 난 뭘 좋아해?> 미리보기 ②

‘디자이너’라고 하면 왠지 좋아하는 일 하면서 사는 사람 같고, 일을 즐길 것 같은 이미지가 있다. 결과물이 한눈에 드러나고 이미지를 많이 다루는 직업이라서 남들 눈에는 흥미로워 보였을까? 아니면 다른 업계보다 낮은 연봉과 잦은 야근을 보며 ‘그 돈 받고 저 고생을 사서 한다고? 일이 좋아 죽겠나 보다’ 이런 느낌일 수도 있겠다. 


한 때는 이런 디자이너에 대한 고정관념을 즐겼고, 오랫동안 내가 디자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디자이너로 살아온 지난날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니었다. 오히려 억지로 ‘나는 디자이너니까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어, 남들보다 일을 즐기고 있어, 디자인이 재미있어’라고 스스로 세뇌했다.  




연차가 쌓일수록 업무는 능숙해졌지만 디자인을 잘하는 것과는 별개였다. 나는 회사에서 필요한 낮은 수준의 디자인을 문제없이 해내는 사람일 뿐이었다. 누군가는 ‘회사원이면 그 정도만 해내면 되는 거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지만 스스로 만족도가 낮으니 괴로웠다. 언제부터인가 나 자신을 디자이너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누군가 직업이 뭐냐고 물어본다면 ‘엑셀 대신 디자인툴을 자주 다루는 회사원‘이라고 소개하는 게 더 편하게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예전에 갖춰둔 실력을 소모하면서 일을 한다는 기분이 든 지 오래됐다. 이 세상에 도태 어워즈가 있다면 수상자는 의심의 여지 없이 나라고 생각했다. 디자인을 더 잘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한 완성도 높은 디자인을 봐도 부럽거나 질투 나는 감정이 들지 않았다.


내가 하고 싶은 게 없는 디자이너라는 사실은 회사에서 디자인 빌런 때문에 지쳐 딴생각을 하다가 우연히 알게 되었다. 디자이너가 있는 곳엔 디자인 빌런이 있다. 그들은 기가 막히게 디자인을 이상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다. 어디선가 비밀리에 개설된 ‘디자이너를 괴롭히는 방법’이라는 특별 세미나라도 참가한 것처럼. 빌런 김 부장에게 패배하고 내 손으로 직접 포스터를 찌라시로 수정하고 있는 모습에 자괴감을 느끼던 어느 날. 아무도 나에게 디자인 가지고 뭐라 하지 않는다면 어떨지 상상해 봤다.


‘그러면 뭘 디자인해야 하지?’


만약 자유롭게 디자인 할 수 있다면 ‘2-30대를 타깃으로 특정한 콘셉트의 작업물을 해보고 싶고, 컬러는 밝고 화사하게, 서체는 개성 있으면서도 깔끔한 스타일을 쓰고…’ 생각이 멈추지 않고 이어서 나올 줄 알았다. 놀랍게도 어떤 디자인을 하고 싶은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평소에 불만이 많았던 만큼 하고 싶은 디자인이 분명 있었을 텐데 이상하게 내 머릿속은 백지상태였다.


지금까지 나는 디자인을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디자인을 하기 싫게 만드는 업무 환경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알고 보니 내가 하고 싶은 디자인이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은 충격이었다. 오랫동안 좋아했던 대상이 갑자기 눈앞에서 뿅 하고 사라진 기분이었다.


디자인을 좋아했던 과거의 내가 떠올랐다. 대학생 때 조별 과제에 팀원이 무임승차를 해도 디자인이 재미있어서 화 한번 안 내고 혼자 다 해버렸던 나, 유럽으로 출장 가서 컴퓨터 화면 속에만 있던 내 디자인이 실제로 구현된 모습을 보며 벅찼던 나, 유명한 디자이너가 되어 잡지에 내 디자인이 실리고 인터뷰하는 모습을 상상했던 나. 디자인과 함께한 행복했던 모습이 전부 꿈만 같았다.


‘앞으로 더 이상 이루고 싶은 꿈이 없다’ 이런 말은 최고의 자리에 올라 더 이룰 것이 없는 사람들이나 하는 소리인 줄 알았다. 디자이너로서 이룬 것이 쥐뿔도 없어도 하고 싶은 게 없을 수 있다는 걸 나를 보며 깨달았다. 내가 이루고 싶은 꿈이 없는 디자이너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땐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잊을만하면 찾아오는 번아웃이라 생각했고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 여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상태는 악화될 뿐 나아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 난감한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대책이 필요했다. 언제까지 알맹이 없는 빈 껍데기 같은 디자이너의 모습으로 살 수는 없었다. 처음엔 디자인을 다시 좋아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하지만 역효과였다. 디자인이 더 꼴 보기 싫어졌다. 디자인은 일단 뒤로하고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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