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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밋 Dec 07. 2023

작은 변화가 가져온 뜻밖의 결과

이걸 왜 몰랐지?

일상에 변화를 주는 것은 지루함을 덜어내는 데 도움이 된다. 큰 변화는 부담스럽고 출·퇴근할 때 늘 다니던 길 말고 옆길로 돌아서 가는 정도의 작고 소소한 변화를 즐긴다. 별것 아닌 듯해도 생각보다 기분 전환이 된다. 그날도 일상에서 작은 변화를 시도한 날이었다. 평소라면 귀찮아서 지나칠 일이었지만 ‘한 번 해볼까?’하고 시작되었다. 그땐 몰랐다. 작은 변화가 불러일으킬 예상치 못한 결과를.





길거리 설문조사

오랜만에 미용실에서 머리를 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머리를 하는 동안 해가 저물어서 길이 어둑어둑했다. 바람이 스치면 기분 좋은 헤어 에센스 향이 코끝에 머물렀다. 걸을 때마다 찰랑거리는 머릿결이 느껴졌다. 머리가 예쁘게 잘 돼서 기분은 좋은데 약속이 없어서 집에 바로 가기 아쉬웠던 찰나.


“안녕하세요! 저희가 대학생 서포터즈 활동으로 독서에 관련된 설문조사를 하고 있는데요, 혹시 참여해 주실 수 있으세요?”


평소 같았으면 무시하고 지나갔을 텐데 대학생 때 학교 과제로 모르는 사람들에게 설문조사 참여를 유도하면서 고생했던 기억이 나서 설문조사에 응했다. 그들은 읽었던 책 중에 가장 좋아하는 책은 무엇인지, 어떤 내용인지, 왜 좋아하는지 등 책과 관련된 질문을 이어서 했다. 대학생들은 흥미롭다는 듯이 내 얘기를 들어줬고 당장이라도 내가 말한 책을 읽고 싶은 사람처럼 호응해 줬다. 


“설문조사 참여자 중에 좋은 답변을 주신 분을 선정해서 인터뷰를 한 번 더 진행할 예정인데요. 혹시 참여할 수 있으세요?” 


거절하기엔 그들과 내가 좋아하는 책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이미 기분이 굉장히 좋아진 상태였다. 한 번 더 작은 변화를 시도해 보기로 했다. 우린 다음 주에 한 카페에서 다시 만나기로 일정을 잡았다.  



인터뷰에서 만난 인연

약속한 카페에 갔더니 설문조사를 진행했던 대학생들 말고도 한 명이 더 있었다. 지영씨도 나처럼 설문조사에 참여했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인사를 나누고 책과 관련해서 이야기하다 보니 서로 편해져서 사적인 얘기도 조금씩 하기 시작했다. 나는 요즘 번아웃을 겪고 있고  좋아하는 것이 없어서 고민이라고 얘기를 꺼냈다. 지영씨도 나와 같은 비슷한 고민을 겪었다면서 자기 이야기를 해줬는데 마치 인생 선배를 만난 기분이 들면서 동질감이 느껴졌다. 한창 이야기를 주고받다 지영씨는 가방을 뒤적거리며 물었다.


“본업은 아니지만 에니어그램 공부도 하고 있는데요, 혹시 테스트 한번 해보실래요?”


심리치료를 공부하는 친구가 말해줬었던 테스트여서 거부감은 없었지만 굳이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대학생들이 해보고 싶다고 하는 바람에 얼떨결에 나까지 검사지를 작성했다. MBTI처럼 자신의 성향에 대해 파악할 수 있는 검사였다. 지영씨가 다음 일정이 있어서 자리를 떠나야 해서 혹시 검사 결과 해석이 필요하면 따로 연락 달라며 명함을 줬다. 명함을 받아 지갑에 넣어두고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고마운 지영

테스트까지 하고서 결과 해석을 듣지 않으니 뭔가를 하다 만 기분이 들어 영 찝찝했다. 나에 대해 알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커질 때였다. 테스트 해석을 통해 나에 대해 잘 알게 되면 내가 좋아하는 것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갑 속에 있던 지영씨의 명함을 찾아 연락했다.


우리는 한 카페에서 다시 만났다. 지영씨는 검사지에 대한 해석을 통해 나 자신도 모르고 지나쳤던 나에 대해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요즘 골머리를 앓는 고민도 상담해 줬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고 싶은데 뭘 해도 금방 싫증 나고, 무엇이든 목표한 것도 늘 이루지 못하는 게 고민이라고 얘기했다. 이런 고민을 주변에 물어볼 사람이 없어서 혼자 끙끙댔는데 정말 인생 선배처럼 나에게 도움이 되는 답변을 해줬다. 


지영씨가 나를 위해 개인 시간까지 써가며 대가 없이 테스트 결과 해석도 해주고, 고민 상담도 들어줘서 고마웠다. 지영씨는 내 덕에 이런 시간을 가지면서 공부할 수 있어서 오히려 고맙다고 했다.


세 번 정도 만남을 이어갔을까. 지영씨는 본업이 바빠져서 앞으로 같이 시간을 못 보낼 것 같다며 자기보다 더 경험이 많은 선배를 소개해 줘도 괜찮겠냐고 물었다. 지영씨와 점점 친해지고 있다고 생각해서 아쉬웠지만 그동안 나에 대해 알아가는 경험이 좋았기에 그러겠다고 했다.



지영씨의 선배

소개받은 선배라는 분은 지영씨와는 다른 느낌의 사람이었다. 조용하게 말하지만 말에 힘이 있었고, 내가 다양한 이야기를 하게끔 분위기를 만들고 유도하는데 능했다. 정신 차리고 보니 홀린 듯이 친구들조차도 모르는 힘들었던 시절의 이야기를 그 사람과 하고 있었다. ‘내가 왜 오늘 처음 만난 사람한테 이런 얘기를 하고 있지’ 싶었는데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앞으로는 성경책으로 자기 이해 공부를 하려고 해요”


갑자기 웬 성경책? 정말 뜬금없었다. 무교인 탓에 더 거부감이 들었다. “꼭 성경책으로 공부해야 하나요?”라고 물으니, 교회에 다니지 않더라도 다양한 분야의 집단에서 성경책을 공부 교재로 사용한다는 거다. 굉장히 수상한 냄새가 폴폴 풍겼지만 일단 다음 만남을 기약하고 자리에서 벗어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서 집에 가는 길에 설마설마하며 검색을 해봤다. 검색하자마자 첫 화면 맨 위에 뜬 대표적인 사이비 포교 수법을 클릭해서 읽어봤다. 길거리 설문조사, 테스트 진행, 테스트 해석, 성경 공부… 내가 겪은 내용이 그대로 적혀있었다. 나는 전형적이고 대표적인 사이비 포교를 실시간으로 당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변형된 수법도 아니고 사이비 포교의 기본 수법에 당했다는 사실에 굉장히 자존심이 상했다.


대학생 시절을 떠올리며 행동한 선의와 고민을 덜어내고 싶은 마음을 구석구석 치밀하게 이용했다는 사실에 너무 화가 났지만, 다시 만나서 나한테 왜 그랬냐고 따질 순 없었다. 문자로 당신들이 사이비인 걸 알았으니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며 연락처를 차단했다. 




글을 읽으면서 '이거 사이비 수법인데' 하고 바로 눈치챈 사람들도 꽤 있을 것이다. 도대체 왜 이렇게 뻔한 수법에 넘어갔을까? 당시에는 정말 의심할 겨를 없이 뭐에 홀린 것처럼 모든 상황이 자연스러웠다. 지금 생각하면 모든 것이 지나치게 자연스러운 점이 굉장히 이상하다. 그저 나를 알고 싶었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결과가 이렇게 되다니. 


이 일의 여파로 길에서 모르는 사람이 말을 걸러 다가오는 느낌이 들면 극혐의 눈빛을 장착하기 시작했다. 좋아할 거리를 차곡차곡 쌓아두려 했던 마음의 방에 혐오만 남아서 씁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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