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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밋 Mar 29. 2024

예상치 못한 곳에서 찾은 단서

작은 단서 모으기

좋아하는 것이 없는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찾으려면 왠지 특별하거나 대단한 경험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동안 재미있는 일을 겪지 못해서, 일상이 매일 반복되고 평범하니까 좋아하는 게 뭔지도 모르고 사는 거 아닐까.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단서를 얻은 곳은 굉장히 사소하고 평범한 일상이었다.




회사 메일에서 찾은 단서

회사에서 메일을 쓰는 일은 그저 업무를 위해 필요해서 하는 일이다. 감사하지도 않은 일에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감사합니다’로 끝내는 메일이 특별할 게 있을까. 나에게 업무 메일이란 ‘일이 이렇게 진행되고 있으니, 나중에 딴소리하지 마시고 알아두십쇼. 이 메일이 증거임’에 가까웠다. 이토록 재미없는 회사 메일을 쓰면서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회사에서 메일을 쓰면 끝에 서명을 넣는다. 회사명, 이름, 직책, 부서, 전화번호, 메일주소, 회사 주소. 서명에 정해진 형식이 없어서 직원들은 자유롭게 썼다. 명함을 사진으로 찍어서 서명으로 쓰는 사람도 있었고, 회사 로고를 유난히 크게 넣는 사람, 영문으로만 표기하는 사람 등 서명만 봐도 직원들의 특성이 조금씩 드러났다. 


마음에 드는 서명 서식이 없어서 보기 좋게 정리했다. 명함이 서명으로 쓰기에 가장 적합한 서식이라고 생각해서 명함 디자인을 참고해 비슷하게 서명으로 만들었다. 언제부턴가 팀원들과 메일을 주고받으면서 익숙한 서명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내가 쓰는 서명 서식을 말없이 그대로 따라 하는 사람이 하나둘 늘었기 때문이다. 다른 직원들이 보기에도 서명 서식이 마음에 들었는지 따라 하는 모습이 어쩐지 귀엽게 느껴졌다. 별것 아니지만 괜히 기분이 좋았다.  



친구와의 대화에서 찾은 단서

친구로 지낸 지 20년 넘은 친구가 있다. 오래된 친구와의 만남은 여전히 즐겁지만 서로 나누는 이야기는 대단하지 않다. 서로 바빠서 1년에 한두 번 겨우 만나 못 본 동안 있었던 일 얘기하고, 한 얘기 또 하고, 추억팔이 하는 게 전부다.


친구가 우리 집에서 가까운 동네에 이사를 왔다. 친구가 사는 동네에 내가 자주 가는 도서관이 있었다. 친구는 집 근처에 도서관이 있는지 몰랐다고 했다. 나는 여기 자주 간다며 책도 많고 시설도 좋다고, 집에서 가까우니까 한번 가보라고 얘기했었다.


몇 주 지나서 친구가 메시지를 보냈다. 내가 말한 도서관에서 회원가입하고 책도 빌렸다며 사진을 보내줬다. 솔직히 친구가 알았다고 하고 도서관에 안 갈 줄 알았다. 나도 누군가가 추천하면 영혼 없이 알았다고 하고서 넘긴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친구와 좋은 경험을 공유해서 뿌듯했다.



댓글에서 찾은 단서

브런치스토리에 공개적으로 글을 올리면서 댓글이 없어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누구든 봐주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나의 만족을 위해 올린 글이었기 때문에. 글이 점점 쌓이면서 보는 사람이 늘었고 댓글도 하나씩 달리기 시작했다. 


초반에는 내가 쓴 글을 읽긴 한 건지, 본인이 쓴 글도 봐달라는 의미나 마찬가지인 댓글이 대부분이었다. 어느 날 내가 올린 글에 평소와 다른 댓글이 달렸다. 글을 보고 자신이 느낀 점과 평소 생각, 글과 연관된 본인의 경험을 쓴 댓글이었다. 종이책과는 다르게 내 글에 댓글까지 포함해서 한 편의 글처럼 느껴졌다. 누군가에게 생각할 거리와 공감할 거리를 주었다는 사실에 기뻤다. 


내 글을 읽고 독자가 시간을 내어 자신의 이야기를 수고스럽게 풀어놓는다는 게 이렇게나 기분 좋은 경험일 줄 몰랐다. 내가 쓴 글을 바탕으로 사람들과 댓글로 소통하면서 그때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회사 사람들이 내가 만든 메일 서명을 따라 하고, 내가 추천한 도서관을 친구가 기억하고 이용했던 바로 그때.


작은 단서들을 통해 내가 타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을 좋아하고, 주변 사람들과 좋은 경험을 공유하는 것에서 만족감을 느낀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사소한 행동, 취향, 관심사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그들의 행동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이 즐거웠다.


단순한 정보 전달보다 내가 직접 겪은 경험, 나의 관점이 더해진 이야기, 나의 취향이 드러나는 창작물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소통할 때 만족도가 컸다. 나의 작은 행동이나 습관이 타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인식은 자신감을 키우고, 더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동기를 부여했다.


발견한 단서들을 이어서 언젠가 뉴스레터를 발행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뉴스레터는 구독자의 메일로 전송되기 때문에 브런치스토리와 인스타그램보다 구독자와의 거리가 가깝다. 직접 만든 콘텐츠를 통해 나와 결이 맞는 독자와 단발성 소통보다 지속적이고 깊이 있는 소통을 하고 싶다.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과의 소통은 나와 구독자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지 않을까.




좋아하는 것을 찾기 위해 필요한 건 대단한 경험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궁금해하는 마음이었다. ‘고작 이런 데에 숨어있었어?’ 하고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는 묘미. 앞으로도 일상에서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얻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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