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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Oct 10. 2023

그녀를 조심하세요

돈 안 갚는 아이 친구 엄마로부터 호구 탈출하기

  세상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을 더 좋아하는 기버(giver), 반대로 주는 것보다 더 많이 받으려고 하는 테이커(taker) 그리고 받은 만큼 상대에게 돌려주려고 하는 매처(matcher)이다. 나는 과연 어떤 유형일까. 타고난 천성이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후천적 양육방식에 의해 철저히 기버로 키워졌다.      


  세상의 중심이 ‘나’인 게 당연한, 뭐든지 ‘내 것’이라고 주장할 나이인 3살 때 남동생이 태어났다. 처음이야 떼도 부리고 질투도 했겠지만, 곧 ‘착한’ 누나가 되어 ‘양보’하는 것이 그나마 사랑과 관심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을 깨달았다. 일찍부터 내 감정을 누르고 타인의 기대에 맞추어 사는 법을 체득한 것이다. 당시의 많은 동화가 착한 사람은 상을 받고 나쁜 사람은 벌을 받는 내용이었다. ‘속상하고 싫지만, 꾹 참고 양보하면 언제가 콩쥐처럼, 신데렐라처럼 나에게 더 큰 상이 돌아올 거야.’ 이런 생각으로 마음을 달랬다.      


  나는 ‘동생에게 양보하는 착한 누나’,‘집안일을 돕는 착한 딸’, ,‘좋은 대학에 간 자랑스러운 딸’ 일 때에만 빵 부스러기와도 같은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존재 자체로 듬뿍 사랑받아 본 경험 없이 조건적인 사랑만 받다 보니 내가 상대에게 도움 되는 일을 하거나, 물질을 제공해야 내 존재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강박이 생겼다.      


  흔히 기버를 타고난 착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기버는 착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슬픈 사람이다. 착해야만 사랑받을 수 있고, 뭔가를 주어야 무리에 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버의 눈물 자국을 테이커들은 기가 막히게 알아본다. 하지만 기버가 테이커를 알아보기란 쉽지 않다. 처음에 양의 탈을 쓰고 접근하기 때문이다. 내가 만난 그녀 역시 누구나 호감을 가질 법한 인상이었다.      




  어느 날 아이랑 동네 문방구 앞을 지나는데, 비슷한 또래의 여자아이가 뽑기 기계 앞에 앉아 있었다. 자연스레 두 아이가 함께 놀고 있는데, 이내 한 여자가 다가왔다. 잡티 없이 뽀얀 피부에 까만 생머리를 한 그녀는 아이 엄마라기보다는 대학생같이 보였다. 그렇다고 몸매가 아주 날씬하고 이목구비가 화려한 미인은 아니었다. 적당히 날씬하고, 적당히 예쁘장한 마치 AI가 합성해서 만들어낸 대한민국 평균 여성과 같은 느낌이었다.      


  우리는 공통점이 많았다. 둘 다 외국에서 살다 한국에 들어왔고, 엄마들 나이도 아이들 나이도 비슷했다. 근거리에 살고 있으니 종종 만나서 놀면 좋겠다고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그녀의 호들갑은 기분 나쁜 호들갑이 아니었다. 나는 감정을 누르느라 늘 흑도 아니고 백도 아닌 회색빛으로 가라앉아있었는데, 그녀가 호들갑을 떨며 말을 하면 색색의 화사한 꽃망울이 터지는 느낌이었다.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H엄마’라고 저장하는데 그녀가 자기의 이름을 함께 저장하라며 알려 주었다. 아기 엄마가 되고 나서부터 점점 자신의 이름을 잊게 되는 게 안타깝다고 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처음이라 무척 신선했고 그녀의 말에 공감이 갔다.          


  우리는 자주 만나서 놀았다. 처음으로 우리 집에 초대했을 때 대뜸 그녀가 물었다. “여기 자가예요, 전세예요?” 그런 걸 대 놓고 묻는 사람이 없었는데 참 당황스러웠다. 남편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자세히 물었다. 당시엔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우리 집의 경제력을 가늠하는 것이었다.     


  나보다 먼저 이 동네에 살고 있었던 H엄마는 정보가 많았다. 덕분에 아이를 같은 놀이 기관에 보냈고, 함께 동네 맛집 투어도 했다. 답답한 집에서 아이와 둘이 옹알거리다가 밖에 나와 어른의 대화를 하니 숨통이 트였다. 내가 좋은 친구를 만났구나. H엄마에게 고마운 마음이 컸다.     




  같이 박물관에 가기로 한 아침이었다. 파리바게트에서 아이들이랑 간단히 빵을 먹고 계산을 하려는데, H엄마가 지갑을 안 가져왔다고 했다. 평소 고마운 마음도 있었고 금액이 크지 않아 그냥 내가 냈다. 그랬더니 손사래를 치며 나중에 정산하자고 했다. 그렇게 박물관 입장료, 주차비, 점심 식사 비용까지 내가 다 계산을 했고, 집에 돌아와서 H엄마에게 사용 내역과 정산 비용을 카톡으로 보냈다. 그런데 꽤 오랜 시간이 지나도 메시지 확인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다음 날 전혀 엉뚱한 내용의 메시지가 왔다. ‘길을 지나가다가 로기 버스(만화 캐릭터)를 봤어요! ^^’     


  뭐지? 바로 위의 내용이 안 보였을 리 없는데, 내가 보낸 내용을 읽고도 모른척하는 뻔뻔한 그녀의 태도에 괜히 도리어 내 얼굴이 붉어지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리고 이 상황을 스스로 납득하고 합리화할 애처로운 긍정 회로를 마구 돌렸다. 나에게 그녀가 중요한 사람인가? 중요한 사람이다. 금액이 큰가? 아니다. 돈을 달라고 다시 말할 용기가 있는가? 없다. 오케이, 허물없이 친한 사이에 내가 얼마 안 되는 금액을  진짜로 달라고 해서 H엄마가 속이 상해서 그랬나 보다. 그럴 수 있지. 이 정도 금액은 그냥 넘어가자. 친구잖아? 그동안 받았던 것도 있고.     


  그간 그녀는 직접 만든 파스타 소스나 아이 내복, 양말과 같이 잊을만하면 소소한 선물을 하나씩 주었다. 물론 나는 과하게 황송해하며 그때그때 밥을 사든 간식을 사든 받은 것의 두 배로 돌려주었지만, 누군가에게 뭘 받아 본 경험이 별로 없었던 나는 그녀의 행동이 굉장히 특별하게 느껴졌고 그걸 이번 일의 면죄부로 삼았다. 그래도 마음속 깊이 찜찜함이 남았지만 애써 포장하여 서랍 속 깊이 넣어 두었다. 하지만 머지않아 그 서랍을 또 열게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놈의 지갑은 발이 달렸는지, H엄마는 또 지갑을 안 가져왔다고 했다. 그런데 꼭 사야 하는 ‘장난감’이 있다며 나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약값도 아니고 교통비도 아니고, ‘장난감’을 남에게 돈을 빌리면서까지 사려고 하는 그녀가 솔직히 이해되지 않았지만, 늘 지갑에 비상금으로 가지고 다니는 5만 원을 그녀에게 건넸다. 돈을 받고 그녀가 예의 그 해사한, 꽃망울 터지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잘됐다. 기민이 엄마, 우리 남은 돈으로 맛있는 거 사 먹어요.” 너무나도 밝은 얼굴로 개소리를 하니 정신이 혼미했다. ‘내가 빌려준 돈으로 같이 맛있는 걸 사 먹으면, 나는 그 금액을 다 돌려받을 수 있긴 한 건가? 이 사람 뭐지?’ 어버버버 하는 사이에 나는 H엄마의 손에 이끌려 그녀의 집에 놀러 가게 되었다. 집에 왔으니 당연히 지갑이 있을 테고, 당장 돈을 갚는 것이 순서일 텐데, 그것은 나만의 상식이었나 보다. 그날은 결국 나도 돌려받는 것을 잊고 집에 갔다.      


  일주일이 지나도 그녀가 돈을 갚을 기미가 안 보였다. 그래서 내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이 어색한 연기를 하며 돈을 돌려줄 수 있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지금 현금이 없다고 했다. 주변에 ATM이 널렸고, 인터넷뱅킹으로 언제든지 돈을 주고받을 수 있는 이 시대에 현금이 없어 돈을 못 주겠다는 말은 어떻게 봐도 핑계였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이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마음에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하고 넘어갔다. 2주째가 되자 나의 분노 게이지는 극에 달했고, 착한 사람, 좋은 친구 따위 때려치워도 좋으니 이 사람한테서 손해 본 것을 모두 돌려받아야겠다는 악에 받친 마음만 남았다.     


  같이 밥을 먹다가 작정을 하고 돈 이야기를 꺼냈다. 핑계에도 참 성의가 없지, 또 현금이 없다고 했다. 이건 예상 못한 바가 아니었다. 나는 나도 통장정리를 해야 하니, 같이 은행에 가서 돈을 뽑자고 말했다. 그랬더니 주변에 은행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식당 주인에게 물었고 근처에 국민은행이 있다고 해서 갔다. 그랬더니 자기의 주거래은행은 우리은행이라는 것이다. 기가 차서 주변을 둘러보니 한 블록 정도 되는 거리에 작게 우리은행 간판이 보였다. 그러자 이번엔 H를 데리고 저기까지 걸어가기가 너무 힘들다고 했다.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그녀의 주특기였던 꽃망울 팡팡 터지는 미소로 웃으며 “우리 힘내서 걸어가요.”라고 말했다. 은행 근처에 다다랐다. 가까이에 작은 뒷문이 있길래 그리로 들어가려는데 H엄마가 친절하고 다급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아, 기민이 엄마 그쪽으로 들어가면 은행 안 나와요.”      


  ‘응? 이게 무슨 소리지?’ ‘설마... 은행 위치를 이미 알고 있었던 거야?’ 인류애가 차갑게 식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한때 친구라고 믿고 의지했던 사람이었는데, 돈 5만 원에 이렇게 온갖 핑계와 거짓말까지 해가며 나를 기만하려고 하다니. 어디부터가 진짜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나를 진심으로 대한 적이 있긴 한지, H엄마에 대한 혐오감과 이런 사람을 끊어내지 못하고 여태 질질 끌어온 나에 대한 수치심으로 온몸이 굳어졌다. 하지만 이걸로 명확해졌다. 이 사람과 더 이상 볼일은 없겠다. 돈을 돌려받고 손절해야지. H엄마는 내가 거짓말을 눈치챈 것을 안 건지, 아니면 이젠 궁지에 몰렸다 싶어서 그랬는지 ATM기에서 순순히 돈을 뽑았다. 나는 지난번에 못 받은 정산 금액까지 달라고 이야기했다. 그녀는 갑자기 경우 바른 척을 하며 천 원 한 장까지 정확하게 돈을 돌려주었다. 이날 내가 H엄마에게 느낀 공포와 혐오, 전율은 그 어떤 호러 무비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었다. 나는 그녀와 서서히 멀어졌고 결국엔 연락을 차단했다.     




  호감 가는 사람이 나에게 다가와 친구가 됐다는 것은 나 역시 그에게 호감 가는 사람이라는 증거이다. 내가 굳이 그 사람에게 비싼 밥을 사고, 돈을 빌려주고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내 존재 가치를 인정받고, 일그러진 친구 관계를 유지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 행위는 그 사람보다 내가 부족하지만 어떻게든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클 때, 쓰는 뇌물 같은 것이 아닌가. 그렇게 해서 친해진다 한들 그 관계를 친구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나는 나 자신과 나의 돈을 좀 더 소중히 여겨야 했다. 그랬다면 정산 요청을 무시하는 그녀에게 당당히 다시 이야기를 했을 것이고, 그녀가 주는 소소한 선물을 기쁘게 받고, 언젠가 비슷한 소소한 선물을 건넸을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쌓아온 우정을 버리기에 아깝다는 이유로 H엄마가 테이커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다.  그녀의 비상식적인 행동을 어떻게든 이해하려는 노력은 했지만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았다. 내가 나를 존중해야 남도 나를 존중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어린 시절 만들어진 강박적인 생각을 이제는 깨야 한다. 기버가 되어야만 사랑받을 수 있는 거라면 나는 그런 사랑 따위 필요 없다. 10명 중 2명은 아무 이유 없이 나를 좋아하고, 또 그중 2명은 아무 이유 없이 나를 싫어하고, 나머지 6명은 나에게 관심이 없다고 한다. 그러니 굳이 모든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고 사랑과 인정을 받아야 할 필요가 없다. 나는 그냥 나 자체로 사랑스러운 사람이고 가치 있는 사람이다. 이제는 더 이상 테이커(taker)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기버(giver)의 눈물을 닦고 매처(matcher)가 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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