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수기 1
유서를 작성하다 우연히 발견한 습작들을 보고 이 지옥에서 벗어나야겠다는 다짐을 한 후, 그간의 심경을 두서없이 적어둔 수기가 있다. 약 2년의 시간이 흐른 후 다시 보니, 내가 많이 힘들었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살짝 웃음도 났다. 요가와 담마를 수련하고 있는 지금의 나로서는 그때의 내 대처와 감정선이 다소 극단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상황에 처음 빠지면 누군들 안 그럴까 싶지만.
방랑을 시작하게 된 계기에 대한 글을 쓴 이후, 앞으로는 방랑 중에 겪었던 일화와 내 생각들 그리고 여행지에 대한 글을 쓸 계획이다. 하지만 그전에 혹시라도 비슷한 증상을 앓고 계신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이 수기를 공유한다.
나는 왜 살까.
30대의 중턱을 지나가던 어느 날 그런 의문이 들었다. 나는, 왜 살고 있을까.
한 프랑스인은 인간은 어떤 특별한 이유도 없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 했고
한 러시아인은 그저 태어난 김에 사는 거라고 말했다.
내가 존경하는 한 한국인은 인생이란 건 특별할 게 없다고 했다.
인생은 드라마나 영화가 아니라고.
하지만 나는 굉장히 오랜 시간 동안 내가 특별하다고 생각했다.
내 인생이 특별하다고 생각했다. 굉장히 오랜 시간 동안...
어쩌면 너무 늦게 깨달았는지도 모를 정도로 오랜 시간...
아마도 누구나 어느 나이까지는 그랬겠지만 나는 내가 특별한 줄 알았다.
두세 가지 이루고 싶은 큰 꿈이 있었고, 해보고 싶은 일들이 굉장히 많았다.
그것들은 꽤나 구체적인 것 들이었고, 주어진 재능으로 충분히 이룰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서른 즈음부터 내가 기대했던 타임라인에서 조금씩 뒤쳐졌지만,
나 정도면 꽤 괜찮은 인생을 풍성하게 잘 살고 있는 것이라 자위했다.
후회 없이 열과 성을 다 바친 사랑도 해봤고,
좋은 회사에서 좋은 기회, 값진 경험도 해봤고,
돈도 꽤 벌었고,
세상도 좀 돌아다녀 봤으니까.
그걸로 지체된 시간 정도는 충분히 보상된다고 생각했다.
아직도 나는 특별하고 내 인생은 충분히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다.
사실 조금씩 알아채고 있었다. 내가 나를 속이고 있다는 걸.
내 인생은 전혀 괜찮지 않고 나는 특별하지 않다는 게 조금씩 밝혀지고 있었지만,
내 무의식은 그걸 용납할 수 없었는지, 나를 포장해 갔다. 오랜 시간 동안.
꿈을 좇는 사람.
내가 보는 나는 꿈을 좇는 멋진 사람이어야 하니까.
특별한 꿈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며,
일말의 우월감과 허영으로 꿈과 현실의 간극에서 오는 허기를 채웠다.
그리고 그들에게 시답잖은 조언을 해댔다.
다양한 경험을 해서 좋아하는 일을 찾아보라고.
돈보다는 꿈을 좇으라고. 그게 인생에서 중요한 것 아니겠냐고.
다른 사람들의 잣대와 시선이 뭐가 중요하냐고, 신경 쓰지 말라고.
너만의 인생을 살라고.
실은 자기가 제일 신경 쓰고 있으면서…
하지만 그런 세속적인 가치들에 누구보다 신경 쓰고 있는 것은 바로 나였다.
속물, 허영덩어리, 내로남불, 기만자.
처음부터 이런 것은 아니었다.
가난한 가정에서 나고 자랐지만, 내가 추구해야 하는 가치를 내 결핍에서 찾지 않았다.
낭만이 있었다.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고 싶었다.
이후에 그것은 자기기만으로 변질됐지만, 한때는 진심이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돈보다 앞서 추구한 다른 가치들,
내 꿈을 이루는 데 있어서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결국 그 보상 심리로 누구보다 더 돈을 추구하는 사람이 되었다.
괴물과 싸우는 자는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나는 그렇게 빛 좋은 포장 속에 갇혀서 나를 고립시켜 갔다.
포장에는 거리와 시간이 필요하니까.
누구에게도 이런 추하고 못난 모습은 보여줄 수 없으니까.
지체된 내 타임라인을 따라잡기 위해 달려야 하니까.
철저히 혼자서. 혼자 가야 빠르니까.
가족도 친구도 내 필요에 의해서만 만났다.
아무런 목적과 목표 없이 그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낭비라고 생각했다.
심할 때는, 한 해 동안 그들을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은 적도 있었다.
목적을 위해 선택과 집중을 한 거라고 합리화했다.
그렇게 내게 시간적 여유가 없어질수록 마음의 여유도 없어졌고
사람들을 대할 때도 여유가 없어졌다.
내 목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철저히 무시하고 배제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내 기대에 못 미치면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척, 가르치려고 들었고
겉으로는 친절하게 웃었지만, 속으로는 한심하다 생각하며 무시했다.
마치 내가 아직까지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이 그들의 탓인 것 마냥.
사회 탓, 조직 탓, 남 탓을 했다.
실은 능력이 안 되는 자기 탓이면서…
어느 날,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10년째 되던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모든 게 내 착각이었음을.
나는 특별하지도 똑똑하지도 않고, 멍청하다는 걸.
내 인생도 70억 인생 중 하나에 지나지 않음을.
아니, 오히려 인생을 잘 못 살고 있었다는 걸.
나를 진정 특별하게 하는 관계들을 외면하고 있었다는 걸.
긴 시간이 무색할 만큼 어떤 한순간에, 벼락처럼 알아챘다.
그렇게 나는 우울증에 빠졌다.
충격이 컸다.
자기 연민보단 약간의 자뻑으로 연명하고 있는 인생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십수 년간 겪어왔던 그저 그런 감정기복 따위와는 차원이 달랐다.
길고 깊은 착각 속에서 빠져나와 마주한 내 모습은 굉장히 일그러져있었다.
좋아 보여 마구 덮어썼던 수많은 페르소나들이 기괴하게 얽힌 모습.
선해 보이는 웃는 인상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졌다.
그 모습을 마주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길고 깊은 착각이었던 만큼, 길고 깊은 터널 속에 막 들어왔음을 직감했다.
나는 도망치듯 회사를 그만뒀다.
몇 달을 10평 남짓한 원룸에서 밖으로 단 한 발자국도 내딛지 않고 지냈다.
기술의 발전은, 고립의 기술도 발전시켰다.
밖에 나가지 않아도, 단 한 사람과도 마주하지 않아도 생활이 가능했다.
눈물샘이 고장이 났는지 울어야 할 이유가 없는데 눈물이 나오곤 했다.
그래서 가끔 전화가 와도, 받지 않았다.
아니 받지 못했다.
입을 떼자마자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기 때문에...
오랫동안 말 한마디 하지 않아 잠긴 목소리와
떨리는 목소리를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 와중에도 나는 "잘 지내는" 포장을 해야 했다.
그래서 전화가 울려도 받지 않고 나중에 메시지를 보냈다.
다른 일이 있어서 못 받은 것처럼.
한 달 동안은 거의 침대에 누워서만 지냈다.
수면장애가 있어 잠은 오지 않았지만, 그냥 누워있었다.
앉아있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더 살 이유가 없는 것처럼.
등과 허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라면 하나 끓이는 것도, 간편식 하나 데우는 것도 귀찮아서
침대 위에서 군것질과 방울토마토로 끼니를 때웠고,
심할 때는 한 끼도,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날도 있었다.
배달앱 멤버십에 가입돼 있지만 하나도 쓰지 못했다.
배달기사와 대면할 수도 없었거니와, 주문하는 것조차 귀찮았다.
사실 그때는 폰을 확인하는 것조차 망설여지고 불편했다.
그건 나를 세상과 연결시키는 창구다.
세상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은 내게 그것은 초라한 나를 적나라하게 비추는,
과도하게 눈부신 피하고 싶은 빛과 같았다.
그렇게 한 달 동안 6킬로가 빠졌다.
어느 날부터는 변을 보기가 너무 괴로웠다.
한참을 앉아 집중해도 도무지 소식이 없었다.
그날 결국 피를 봤다.
그때서야 심각성을 느끼고, 하루에 한 끼라도 먹고 물이라도 많이 마시고 집에서라도 간단히 움직였다.
아침은 방울토마토 약간, 점심은 라면을 끓여 먹거나 햇반에 참치캔 하나 정도 같은 걸로 때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내게는 3대 욕구 중 가장 낮은 위치를 차지하는 게 식욕이다.
어렸을 때부터 맛있는 거에 대한 욕심이 크지 않았다.
그게 넉넉하지 않은 살림살이 덕분에 맛있는 걸 잘 먹어버릇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건지
집안 내력으로 DNA에 적혀있는 건지는 모르겠다.
특히 점심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홀로 챙겨 먹어 버릇해서 간단히 먹는 게 익숙하다.
저녁은 먹지 않거나, 또 토마토 또마토를 먹는다.
하루 5천 원 정도의 식비가 들어간다.
서울에서 5천 원에 하루를 나다니, 완전 혜자네.
잊으려고 해도 잊히지 않는 숫자들이 내 가슴을 후벼 파고 있다.
누워서 넷플릭스를 보는데 거기 나오는 모든 인물 하나하나가 대단해 보였다.
그들이 하는 사소한 일 하나도 대단해 보였다.
저걸 어떻게 하지, 귀찮을 텐데.
저걸 어떻게 다 계획하고 생각해서 실행하지, 나라면 못할 거야.
그 정도로 무기력이 극에 달했다.
극 중 인물이 자살하는 드라마를 봤다.
과거에는 자살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죽을 용기가 있으면, 그 용기로 살지.
인생이란 여정 중에 몇 번의 옳지 못한 갈림길로 향했고,
그 선택이 쌓이고 쌓여 안타까운 선택을 했구나...
저 순간에 누군가, 나라도 옆에 있었다면,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건넬 수 있었다면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모르겠다.
그 심정은 누군가 말려서 말려지는 게 아닌 것 같다.
스스로 바꾸지 않으면 결국 돌아온다.
문제는 밖에서부터 오는 게 아니다.
안에서부터 나온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렇게 나는 자살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안락사에 대해 찾아보기 시작했다.
정신적 고통을 사유로 인정하며 외국인을 허용하는 국가여야 했다.
스위스가 유일했다.
내 삶의 흔적을 지우는 것부터 하나하나 과정을 그려보며, 비용을 계산했다.
괜찮아 보였다.
산송장 같은 삶이 두 달 즈음이 되니 기억력과 어휘력이 감퇴된 것 같았다.
몇몇 지인들, 좋아하는 작가들, 영화감독들의 이름과 작품 이름들이 잘 생각나지 않았고
단어들, 특히 알던 한자어들이 생각나지 않았다.
목소리를 내서 말하는 게 어색했다.
영어는 이제 정말 어눌해졌다.
노인이 된듯한 느낌이었다.
목소리도 완전히 쉰 목소리가 나왔다.
두 달 즈음, 지나온 나날들을 반추하고 지내다 보니 다른 우울증 환자들은 어떤지 궁금했다.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과정은 어땠는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떤 증상이 있었는지, 나와 비슷한지.
어떻게 버티고 있는지.
살고 싶은 기분이라는 걸, 느끼는지.
그런 것들이 궁금해졌다.
찾다 보니, 한 가지 눈에 띄는 점이 있었다.
대부분은 "애초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반면 나는 태어난 것 자체는 좋았다.
유복하지 않은, 차압딱지가 붙고, 울리는 전화와 도어벨에 가슴을 졸여야 하는,
그렇게 화목하지만은 않은, 아니 오히려 불우하다고 할 수 있는 가정에서 나고 자랐지만 지금까지 즐겁고 행복한 일도 꽤 있었으니까, 그걸로 피투 된 보상은 충분히 받았다.
단지 이제 충분히 살았다고 생각하는 것뿐이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거나 죄지은 일 없이, 이 정도면 살 만큼 잘 살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죽고 싶다기보다는 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짧은 인생이었지만, 꽤 지치는 인생을 산 것 같다.
생각해 보면 고등학생 때부터 한 번도 제대로 마음 놓고 쉬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삶의 의지가 사라진 눈과 얼굴을 본 적이 있는가?
나는 어머니의 눈과 표정에서 삶의 의지가 사라진 걸 본 적이 있다.
어머니는 나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지친 인생을 사셨다.
어머니라는 말이 부여하는 책임감이 너무나 가혹할 정도로.
물론 나나, 내 어머니보다 더 힘든 인생을 꿋꿋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많겠지만,
고통은 상대적인 거니까.
불현듯 조커의 대사가 생각났다.
"내 죽음이 내 삶보다 더 가치 있기를…"
어떻게 죽어야 살아냈던 삶보다 가치 있을 수 있을까?
생각해봐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