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영국인의 작명 센스를 곁들인
영국 여행엔 숨겨진 재미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지명을 보는 재미가 되시겠다. 규칙을 정하고 따르기를 좋아해서일까, 작명에 욕심이 있는 걸까, 몇 걸음도 안 되는 거리에도 죄다 이름을 붙여 놓는 게 영국 사람들이다. 그래서 지명이 정말 많다. 차를 타고 이동할 때마다 지명이 걸린 표지판을 보면 조용히 읊조려보는 게 내겐 이미 하나의 놀이가 되었다. 언젠가 한 번은 무심코 소리 내서 읽었다가 흠칫 놀란 적이 있었는데, 그 정도로 짓궂은 이름부터 위트가 넘치는 귀여운 이름까지 아주 많고 다양한 지명이 있다. 베이크웰(Bakewell)처럼 마을의 이름과 특징이 너무나 찰떡궁합으로 맛있게 어우러지는 경우도 있고, 피티미(Pity Me)나 크랙폿(Crackpot)처럼 피식거린 후에 마을 주민들의 상태를 걱정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흠칫 놀랐던 이름은 뭐였냐고? 그 녀석은 아마도 같은 한국 사람이라면 왜 사람 사는 곳에 이딴 이름을 붙였는지에 대한 진지한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경우에 속한 것이라 이곳엔 차마 직접적으로 언급할 수는 없다. 바로 성적 비속어와 관련된 케이스였기 때문이다.
베이크웰 케이크는 디저트 강국 영국의 케이크 종류 중 하나다.
이곳 사람들은 정말로 빵을 잘 굽는다(bake well)고 할 수 있겠다.
이전에 브라이튼에 대해 썼을 때 영국의 성적 개방성에 대해 썼다가 자체 심의에 걸려 상당 부분을 검열삭제 후 발행해야만 했는데, 이런 경우를 보고 우리 선조님들이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고 하신 게 아닐까. 왜냐면 비속어나 성에 관련된 암시나, 중의적 표현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지명도 예외가 아니다. 코커마우스, 트왓, 뜨리콕스, 티티호, 페니스톤, 빗치필드, 스크래치 보텀, 그로프 레인, 텀블다운딕, 벝홀로드, 커밍 코트, 핑그링호, 슬럿홀 레인 등등. 이곳에 영어 지명을 그대로 쓸 순 없었으니 양해를 바라며, 내가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던 지명에 대해서는 독자의 예측에 맡기기로 하자. 뜻이 궁금하신 분들은 친절하게도 링크를 걸어 두었으니, 가서 영어명을 잘 살펴보시라. 우아함과 저속함이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하는 영국 전통의 고상한 체하는 일면을 여기서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런 지명들을 접할 때마다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그 피치 못할 사연을 찾아보곤 한다. 사연을 들으면 부... (영국마귀야 물러가라) 무릎을 탁! 칠 정도로 절묘한 작명인 경우도 있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역사적 이유가 있는 경우도 있는 반면에, 작명한 사람의 얼굴이 궁금해지는 경우가 있다. 그 얼굴들을 볼 기회가 있었다면 나는 그중에 가장 고상하게 이쁘고 잘생긴, 귀감이 되는 얼굴들만 골라서 표지만 보고 책을 고르지 말라는 교훈의 본보기로 삼고 싶었을 것이다. 도대체 왜 사람이 사는 동네에, 그것도 아마도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을까? 동아시아에서처럼 음양오행설이나 풍수지리설을 따른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인간의 생식기를 무서워하는 영국 귀신이라도 있었던 걸까? 은탄환이나 마늘, 십자가 대신으로 말이다.
영국에서 내 최애 지명은 콘월 지방에 있는 마우졸(Mousehole)이다. 오타가 아니라는 걸 미리 밝혀야겠다. 한국식 표현으로, 마우스홀이라 쓰고 마우졸이라 읽는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펜잰스 사람들에게 마우졸로 향하는 버스를 어디서 타냐고 물어보면서 계속 '마우스홀'이라고 했다. 그것도 또박또박 발음한다고 마우스-호올, 이렇게. 그 꼴이 얼마나 우스웠을까? 저기 저 아시아 사람이 쪽팔려서 쥐구멍에라도 숨으려고 마우스홀을 찾나 보다 하고 측은하게 여겼던 걸까, 마우졸에 도착할 때까지 그 누구도 내 무지를 바로잡아 주지 않았다. 콘월 사람들이 원래 좀 짓궂어서 그런 건 아닐 테고, 아마도 마우스홀이라고 부르는 외지인들을 하도 많이 봐서 이제 그냥 그러려니 하는 게 아닐까 싶다.
펜잰스에서 버스를 타면 20분도 안 돼서 마우졸에 도착할 수 있다. 물론 걸어갈 수도 있다. 한 시간 정도 걸려서 누군가에겐 가볍게 산보도 할 겸 걸어갈 거리는 아닐 수도 있지만 해안 도로를 따라 걷게 되기 때문에 풍경이 이뻐서 지루하진 않다. 날씨만 좋다면 걸어가는 것을 추천한다. 나는 갈 때는 버스를 탔고, 돌아올 때는 걸었다. 더 느리고 힘든 대신, 더 멋진 풍경을 더 많이 볼 수 있다.
마우졸은 분명 젊은이들에게 인기 있는 여행지는 아니다. 특히 혼자 여행하는 젊은 남자에게는 더더욱. 이 작은 어촌의 평화로움과 아름다움을 잠시나마 빌려보려 들린 사람들 대부분이 머리가 하얗게 센, 한국인이라면 연세라는 그들의 위해 특별히 준비된 단어로 설명을 해야 하는 분들이었다. 간혹 보이는 젊은 사람들은 가족 단위 여행자들이거나 주민들이었다. 그래서 마우졸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어르신들에게 둘러싸여서 손이 자연스레 단전께로 모이는, 그런 공손한 시간을 보냈다.
마우졸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나는 이 앙증맞은 어촌의 귀여움과 아름다운 부두의 풍경에 풍덩 빠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쥐를 닮은 버스가 좁은 골목을 용케도 이리저리 지나서 부두 거의 바로 앞에서 내려주기 때문에 내리자마자 거의 바로 위와 같은 풍경들을 마주할 수 있다. 나는 그대로 빈 벤치에 앉아 쥐구멍에 드는 햇살의 따스한 촉감을 느끼며 망중한의 행복을 만끽했다. 맑은 물과 하늘이 고요한 호흡을 따라 마음으로 번졌고, 갈매기와 이름을 알 수 없는 새의 지저귐이 꽤 괜찮은 합주로 맛을 더했다. 한 시인이 마우졸이 영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은 아니지만 가장 사랑스러운 곳이라고 말했다던데, 그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부두에서 햇살과 풍경을 든든히 섭취한 후, 이제는 배가 고파져서 근처 식당으로 향해 피시 앤 칩스를 시켰다. 피시 앤 칩스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영국에 호의를 가진 한 사람으로서 여기서 그들을 위해 작은 해명을 하는 자리를 가져보려고 한다. 피시 앤 칩스는 영국음식 하면 거론되는 대표적인 음식 중에 하나다. 주변의 다른 서유럽 국가들에 비해 음식이 형편없다는 오명 아닌 오명을 가진 영국으로서는 그나마 잘 알려진 음식이 되시겠다. 하지만 나는 영국에 온 여행자들 중에서 여기서 피시 앤 칩스를 먹고 맛있었다는 사람을 단 한 명도 만나본 적이 없다. 나도 다르지 않았다. 런던에서의 첫날밤, 캠든 마켓에서 피시 앤 칩스를 먹고 이런 생선 튀김쪼가리와 맥도널드 감튀보다도 맛없는 '칩스'에 2만 원을 거뜬히 넘는 돈을 내고 먹는 영국인들의 부유함이랄까, 관대함이랄까, 그게 부럽고 대단해 보일 정도로 실망했었다. 친구에게 내 실망을 토로하니 그가 말하길, "어느 멍청이가 런던에서 피시 앤 칩스를 사 먹어?" 세상 시니컬한 영국 신사의 꾸짖음이 되시겠다. 이 멍청이가 사 먹지, 니 친구.
영국인 특 1 : 잘 투덜거림
영국인 특 2 : 하지만 예의 차리느라 불평은 하지 못함 ㅋ
투덜거리는(Moan) 것과 불평하는(Complaint) 것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어야 영국인을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친구에 따르면 호화 5성급 호텔에서 묵는 게 아니라면 런던에서 피시 앤 칩스를 먹는 건 쓰레기통에 20 파운드를 내버린 후에 그 속에 든 먹다 남은 그렉(Greggs) 샌드위치를 먹는 것보다 멍청한 행동이다. 무지에서 비롯된, 순진해빠진 관광객들이 범하는 전형적인 실수라는 게 친구의 지론이다. 피시 앤 칩스는 영국의 동해나 남해, 바다가 가까운 곳에서 먹어야 진짜 피시 앤 칩스를 맛볼 수 있다. 동해나 남해를 돌아다니다 보면 피시 앤 칩스 로컬 맛집으로 유명한 곳들이 있다. 이런 곳에는 보통 그들이 직접 만든 특제 타르타르소스가 있는데, 타르타르소스를 별로 선호하지 않는 나도 정말 맛있게 먹었을 정도로 맛있다. 생선이 신선한 것은 당연지사. 언젠가 친구피셜 잉글랜드 최고의 피시 앤 칩스 로컬 맛집을 찾아간 적이 있는데, 그날 이후 피시 앤 칩스에 대한 의견을 완전히 정정해야만 했다. 맛집이라 대기가 길긴 했지만, 각자 주문한 신선한 생선으로 만든 피시 앤 칩스를 들고 바닷가 옆에 무심하게 걸터앉아 도시락 까먹듯 먹는 피시 앤 칩스의 맛은 런던의 세련된 레스토랑에서 두 배나 높은 가격을 내고 먹은 것보다 훨씬 맛있었다. 한국으로 치면 울진 죽변항에서 바로 친 오징어회를 들고 부둣가에 앉아 초장을 듬뿍 찍어 먹는 것과 비슷하달까. 물론 감성이 첨가됐지만 냉정하게 맛만 두고 승부해도 런던에서 먹은 피시 앤 칩스는 상대도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때 이후로 피시 앤 칩스는 해안 도시에서만 먹기로 했다.
여기에 친구피셜 피시 앤 칩스 맛집을 써두겠다. 동해에 하나 남해에 하나. 근처를 지날 일이 있다면 꼭 가보시라. 나는 두 곳 모두 너무나 만족했다.
The Fish Plaice @Swanage
Magpie Cafe @Whitby
다시 마우졸로 돌아와서. 배를 채운 이후로는 동내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생쥐나 한 마리 발견할 수 있다면 재밌겠다는 마음으로 골목 구석구석을 살피고 다녔는데, 아쉽게도 쥐꼬리도 구경하지 못했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는 건가. 인도에선 이 식당 저 식당 그렇게 얼굴을 자주 비추더니. 쥐구멍에 쥐가 없다니!
카더라에 의하면, 마우졸은 지금까지 여러 번의 큰 시련을 겪어왔다고 한다. 아주 옛날에 큰 해적 집단의 습격으로 많은 주민들이 죽었다거나, 스페인 군대가 쳐들어와서 지른 불 때문에 마을 전체가 잿더미가 되었다거나, 심지어 2차 세계 대전 때는 폭격까지 맞았다고 한다. 까놓고 보면 어딘들 안 그러겠냐만, 마을 이름이 쥐구멍이라서 그런지 좌절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볕 들 날을 바라면서 희망을 놓치지 않는 인류의 모습을 영국인들 특유의 시니컬한 위트를 통해 본 것 같아서 색다르게 느껴졌다.
참, 마우졸은 화창한 낮의 부둣가 풍경으로도 유명하지만, 밤 풍경으로도 유명하다. 브라이턴 같은 유흥의 풍경은 아니고, 특별한 날에만 볼 수 있는 밤풍경이 있다. 바로 마우졸의 크리스마스 라이트다. 매해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마우졸 부두는 브리티쉬 아일랜드 남서쪽을 빛내는 하나의 큰 크리스마스 장식이 된다고 한다. 아직 영국에서 겨울을 나본 적이 없어서 아쉽게도 내 눈으로 직접 보지는 못했고 영상과 사진으로만 접했는데 정말 이쁘더라. 그래서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영국에서 겨울을 나게 되는 일이 생긴다면 크리스마스 시즌에 꼭 다시 한번 방문하고 싶다.
물론, 영국에서 겨울을 날 계획은 전혀 없다. 영국 날씨의 사랑스러우면서도 지랄 맞은 성깔을 추운 겨울에 감당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