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뚜렷하게 보이지만 그렇다고 가시적인 형태를 갖지는 않고 손에도 잡히지 않는 것이 집. 특히나 아파트라는 공동주택이다. 공간을 차지하는 가족단위 사람들의 행복과 불행이 오가며 각자의 가치가 다른게 당연할 텐데. 부동산에 찍힌 숫자와 이름, 학군을 나누고 집단을 나누는 척도가 되어버리는 게 한국 사회의 아파트이기도 하다. 소유욕. 보금자리. 안과 밖. 다리 하나 건너 이곳까지. 그렇게 입주민. 이웃. 지켜야 하는 것. 다시 소유욕. 그렇다면 다수가 진정으로 소유하려 한 것은 무엇일까.
유토피아의 의미는 인간이 생각하는 최선의 상태를 갖춘 사회. 결국 존재할 수 없는 사회다. 자연재해로 겨우 하나 남은 아파트 사회에선 국회의원도, 목사도, 살인자도 동등하다. 아파트 밖의 존재는 박멸되어야 할 바퀴벌레로 묘사된다. 유토피아라 표현된 황궁아파트에서는 입주민 수칙이라는 게 있다. 확성기를 들고 황궁아파트라는 사회가 돌아가는 방식을 설명할 때, 배우들은 영화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해 관객을 바라본다. 난 이전까지 그들의 사회를 관조하듯 바라보다가 어느새 투입되어 약간의 죄책감을 갖고 어떤 편에 선다. 이미 흑과 백 중 반드시 하나만 택해야 하는 바둑돌 주민 투표에서 죄책감은 시작됐다. 지폐도 의미가 없고, 드림팰리스에서 온 아이 엄마의 비싼 스카프도 가치가 없는 이 유토피아에서 필요했던 건 목숨을 걸고 뭉치는 공동체 의식, 서로를 의심하지 않는 믿음과 분배 받은 것에 대한 만족.
902호의 현관에는 십자가가 있고, 안방에는 추기경의 사진과 성모상이 있었다. 거실엔 커다란 성경 구절이 걸려 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902호의 거주자는 골고타 언덕을 오르듯 폐허가 된 도시를 앞장서 누비며 식량을 찾고 폭력을 휘두르고 끝내 살인을 저지른다. 그리고는 없애야 할 존재를 ‘박멸’했다는 표현과 함께 당당한 모습으로 승리를 외쳤다. 신과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그에게 의심이 생기는 순간. 나와 너, 황궁아파트의 주민과 외부인의 경계에서 어디에 서야 할지 모르겠는 혼돈이 시작된다. 사실 내가 속한 곳은 내가 잠시 등돌리던 집단이 아닐까. 스스로의 나약함과 마주할까 피하려던 모습이 남들에게 들키기 전에 빠르게 소멸되길 바라던 이기심 아니었을까. 뭐라도 바뀔 줄 알고. 그럼 그렇게 될 줄 알고.
계속해서 모순이다. 흑과 백. 무너져가는 인물의 표정과 상반되는 배경 사운드. 어제까지의 아들 목숨과 맞바꿨던 귀한 식량이 오늘은 신적인 존재를 등 돌리는 계기가 되고. 사람 목숨 하나라도 더 살리는 게 중요한 직업의 가치를 좇다 보니 또 다른 한 명의 목숨은 사라졌다. 애타게 찾던 누군가의 실체, 그렇게 시체가 드러나는 장면과 동시에 사람들이 고생 끝에 발견한건 하얀 케이크.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크리스마스트리. ‘살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상황이란 게 있잖아, 지금이 그 어쩔 수 없는 상황이고’ 대사를 들으며 우리는 어느 쪽 인물에게 이입했었나. 영웅과도 같던 존재의 실체를 알았을 때는 또 다른 죄책감을 가졌던가. 변함이 없었던가.
누구는 죽고 누구는 살았다. 어떤 건 형체도 없이 무너졌고 어떤 건 뒤틀린 공간으로 남았다. 90도로 기울어져 간격이 좁아진 건물에서, 생존자들은 층고도 높아 좋다고 표현한다. 좌우는 상하가 되고 상하는 좌우가 되고, 저기로 나가면 뛰어내리는 죽음의 상징과도 같았을 베란다 문이 삶의 터전으로 머물 입구가 됐다. 근데, 묘하게 안정감을 가진 곳이었다. ‘저 그냥 살아도 되는 건가요?’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었어요’. 홀로 서있다고 생각한 곳에서도 생명의 소리는 오고 간다. 우리의 삶으로 들어오는 빛은 공정한데, 불공정한건 빛을 보는 위치였다. 아파트 소유욕에 큰 몫을 하는게 채광이기도 하니까. 저곳에 있을 땐 마냥 희망 없는 어둠이었는데, 이곳에 서니 희미한 한 줄기 빛이었다. 마침내 뒤틀린 공간에 우두커니 섰을 땐 그 어느 때보다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