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공과에 2등으로 합격하고도 욕먹은 유학생 이동(李同)의 경우
사람은 합리적이면서도 비합리적이다. 논리나 이성으로 판단하면 A가 옳은데, B를 택하는 경우가 있다. 감성, 혹은 감정이 앞설 때이다.
예를 들자. 월드컵에서 다음 두 경우가 벌어졌을 때 귀하는 어떤 것을 좋아할까?
1. 한국 축구가 결승에서 일본에 지고 준우승.
2. 한국 축구가 3~4위 전에서 일본을 이기고 3위.
당연히 1이 2보다 ‘좋은 성적’을 낸 것이다. 한데 사람들은 1의 경우를 2보다 더 반길까? 이제, 실제 있었던 역사적 사건을 예로 들자. 어느 신라 엘리트의 ‘물 먹은’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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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에 숱한 문인과 장군이 있었지만, 정사(正史) 기록인 ‘삼국사기 신라본기(新羅本紀)’에 이름이 오른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최치원 김유신 장보고 등 1000년이 훨씬 지나도 기억될 만한 인물만이 기록돼 있다. 이는 고구려나 백제 역시 마찬가지이다.
한데 당나라에 보낸 유학생 신분으로 신라본기에 이름이 오른 이가 있다. ‘이동(李同)’이라는 학생이었다. 유학생 이름이 ‘신라본기’에 오른 것은 이동과 최치원 단 두 명뿐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문왕 9년(869년) 기록에 따르면, 이때 신라는 이동을 포함해서 유학생 3명을 당나라에 보냈는데, 책 사고 공부하는데 보태라고 왕실에서 은 300냥을 하사했다고 기록했다. ‘국비 유학생’ 이동에 대한 신라 왕실의 큰 기대를 엿볼 수 있다.
이동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유학 3년 만인 872년, 외국인을 대상으로 치르는 과거인 빈공과에 떡 하니 합격했다.
이쯤 되면 ‘수재 중의 수재’ 이동의 미래는 탄탄대로였을 것이다. 최치원과 더불어, 유학생 신분으로 신라본기에 이름이 올랐던 사람인데, 유학 3년 만에 그 어렵다는 빈공과에 떡하니 붙었으니, 당연히 출셋길을 달렸겠지.
신라의 당나라 유학생 중 빈공과에 붙은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는 명확히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나 최치원이 효공왕의 이름으로 당나라에 보낸 편지(서기 897년쯤 작성 추정)에서 “유학생 신분으로 10년 기한이 지난 학생들은 신라로 돌려보내 달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유학생 중 빈공과에 붙은 이는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그런 점에서 유학한 지 만 3년 만에 빈공과에 합격한 이동은 수재 중의 수재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동의 이름은 이후 그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최치원이 빈공과에 합격한 사실이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문왕 14년 기록(874년)에 남은 것과는 천양지차이다. 왜였을까?
삼국사기에는 명확히 기록돼 있지 않지만, 신라와 발해는 라이벌 의식이 꽤 강했다. 서기 9세기 후반, 신라와 발해는 당나라가 주관하는 ‘국제 외무 회의’에서 어느 나라 사신이 ‘상석’에 앉느냐를 놓고 싸울 정도였음을 최치원이 당나라에 보낸 편지들은 알려준다. 최치원은 이런 편지에서 발해를 ‘도적의 나라’라고도 불렀다.
그런데 이런 라이벌 의식에 이동이 단단히 ‘먹칠’을 했다. 이동이 빈공과에 합격한 서기 872년, 수석은 발해 사람 ‘오소도’가 차지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충격이 신라인들에게는 무척이나 컸던 것 같다.
이동의 합격 2년 뒤인 서기 874년, 최치원은 빈공과에 수석으로 합격한다. 최치원은 자신을 수석으로 뽑아준 것을 감사하며, 시험 주관자였던 당나라 관료(직책은 ‘상서’였다.) 배찬에게 편지를 보냈다. 발해에 대한 신라인의 적개심이 한껏 드러난 글이다.
“2년 전, 오소도가 신라인을 제치고 빈공과 수석을 차지했습니다. 이는 신발과 모자의 위치가 거꾸로 바뀐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신라로서는 치욕이었습니다. 한데 이번 빈공과에서 저를 수석으로 뽑아주시니, 이 영광이 (신라의 영토인) 삼한에 퍼지게 됐습니다.”
위구르 인이나 티베트 사람, 흉노의 후손이 수석을 했으면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 한데 이동은, ‘신라의 적국’ 발해인이 수석을 한 시험에 붙은 것이다. 그러니, 이동은 빈공과에 붙고도 푸대접을 받을 수밖에.
이동의 이름은 이후, 그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기실 이동이 빈공과에 합격했다는 사실조차, 최치원이 쓴 편지 외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국비 유학생으로 당에 보낸 사실을 삼국사기 본기에 기록했는데, 정작 그가 빈공과에 붙었다는 내용은 최치원과 달리 어디 한 줄 적지 않은 것이다.
헌강왕 11년 3월(서기 885년), 최치원이 신라로 금의환향해서 이곳저곳에 비문을 쓰고, 왕을 대신해서 당나라에 편지를 보낼 때 이동은 ‘적국인 발해 사람에게 수석 자리를 뺏긴 못난 사람’이 되어 ‘찌그러진 삶’을 살았던 것으로 추정하는 것은 필자의 과장된 생각일까?
하여튼, ‘메달’을 따고도 때로는 욕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은 1100여 년 전이나 요즘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추신 1.
신라인의 코를 납작하게 누르며 빈공과에 수석 합격했던 오소도는 그 아들 오광찬 때에 ‘반대의 경우’를 당한다. 서기 906년, 빈공과 수석은 신라인 최언위가 차지했다. 최언위는 신라 말기, 최치원 최승로와 더불어 ‘삼최(三崔)’로 불린 천재였다. 차석은 오소도의 아들, 오광찬이었다.
오소도는 당나라에 편지를 보내 ‘제 아들 오광찬이 수석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나라는 최언위의 성적이 오광찬보다 좋았기에, 오소도의 주장을 묵살했다.(고려사 ‘최언위 전’)
추신 2.
우리는 신라와 발해를 ‘남북국 시대’라고도 부르며, 민족사에 당연히 편입시킨다. 한데, 당시 신라인들은 발해를 ‘언젠가는 통일해서 함께 살아가야 할 나라’라고 생각했을까? 요즘 말하는 ‘민족적 동질감’ 같은 것이 있었을까?
신라인이 남긴 모든 기록을 전수 조사했던 필자로서는 이에 대해 무척이나 부정적이다. 이에 대한 글은 다음번에 쓰기로 한다.
#신라 #빈공과 #최치원 #발해 #이동 #메달따고도욕먹는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