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도면 됐지와 이렇게도 괜찮을까 사이에서 날마다 시소를 기울인다. 이 정도면 됐지, 이 정도로 살면 되겠다, 라는 생각으로 하루. 이렇게도 괜찮을까, 이렇게는 싫은데, 라는 생각으로 또 하루. 이리 기울었다 저리 기울었다 한다. 적당한 균형점을 찾아 묵직하게 수평을 이루고 싶은데 생활은 언제나 미끄러지듯 기울어있다.
서랍을 열었을 때 가지런히 정리된 속옷을 보는 것이나 외출에서 돌아왔을 때 마주하는 말끔한 거실은 안정감과 뿌듯함을 준다. 다소곳한 정갈함에서만 얻을 수 있는 만족스러운 느낌이 있다. 일상이 부지런하고 바르게 움직이고 있다는 충만한 기분. 하지만 그 부지런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큼의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지 알기 때문에 나는 자주 무력해진다. 일상을 영유하기 위해 날마다 이토록 많은 에너지를 소모해야 하다니 나로선 꽤 절망적인 일이다. 평범하고 안온한 날들을 사수하기 위해서 끝없이 치열해야 한다는 사실이 섬뜩하다.
매일 집안일을 해야만 집안이 돌아간다는 사실이 낙담스럽다던 어느 작가는 집안일이 마치 시시포스의 돌 같다고 했다. 멈출 수 없는 집안일의 굴레에 있어 ‘낙담스럽다’보다 더 적합한 표현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나는 그 문장을 읽은 후 낙담스럽다는 말을 수시로 사용했다. 아무튼 일련의 이유로 한동안은 뭐든지 흐트러진 채로 그냥 둔다. 남편과 아이들을 제쳐두고 오로지 나만을 위해서 하고 싶은 일이 많은 내가 에너지를 비축하기 위함이며, 집안일을 벗어날 수 없다는 무력함에서 헤어 나오기 위함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기. 에너지를 비축하고 무력함에서 벗어나자는 의도는 참 좋은데, 어쩐지 마음이 늘 불편하다.
에너지를 분배하는 방식에 있어 큰 결점이 있다. 무언가에 몰입하는 만큼 에너지를 한꺼번에 방출하고 방전 돼버리는 오랜 습관이 바로 그것이다. 집안일을 하기 위해 에너지를 쏟아붓고 나면 책을 읽을 에너지가 줄어든다. 보고 싶은 드라마를 몰아서 보고 나면 글을 쓸 에너지가 줄어든다. 멈추지 않고 글을 쓰다 보면 아이들을 돌볼 에너지가 줄어든다. A를 한 번에 몰아서 하다 보니 B가 쌓이고, 밀린 B를 처리하느라 분투하다 보면 또다시 A 혹은 C, D가 쌓인다. 한놈만 패다 보면 한놈은 넉다운되어 상황이 종료되어야 마땅하건만. 한놈만패서 쓰러뜨려 놓으면 다른 놈들이 덤비고, 쓰러졌던 그 한놈마저도 부활하는 불공평한 게임. 더욱 환멸적인 것은 A, B, C, D를 해내는 동안 너무 자주 방전된다는 점이다. 한놈만 패는데도 왜 이렇게 지치고 마는 것인지. 연극의 한 막이 끝나면 다음 막이 시작되기 전까지 암전이 되는 것처럼 한걸음 떼기에도 사방이 암흑이다.
방전이 되면 충전의 시간을 갖는다. 바로 이 정도면 됐지의 시간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기를 시전해 본다. 그런데 문제는 그 순간에도 일상의 모든 것은 숙제처럼 쌓이고 욕심껏 벌여놓은 수많은 일들이 사채마냥 불어나는 것이다. 암흑 속에서 다시 일어나 몸을 움직이기 전까지 시간이 필요한 나는 쌓여가는 A, B, C, D가 초조해진다. 이렇게도 괜찮을까? 집안이 이렇게 엉망이어도? 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해도? 책을 한 권도 읽지 못했는데? 강의는? 공부는? 줄지어 기다리는 것들을 헤아리다 보면 이렇게도 괜찮을까의 시간이 온다. 에너지가 고갈된 상태로 이 시간을 맞이하면 몸과 마음이 충돌을 일으킨다. 여력은 없는데 마음만 불편한 이러한 충돌은 시소의 밸런스를 무너뜨리고 무너진 곳에는 폐허처럼 우울한 기분이 남는다. 좋지 않은 순환이다.
복식호흡을 하듯 에너지를 크게 들이쉰 다음 일정한 양으로 나누어 균등하게 뱉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균일가 견출지가 붙은 반찬가게 상품처럼 반듯하게 일상을 층층이 쌓을 수 있다면. 3천 원짜리 반찬 3개는 9천 원이지만 4개는 만원이 되는 기적의 효율이 내게도 적용되기를.
베터리 잔량이 얼마 남지 않은 밤. 이렇게도 괜찮을까의 시간이 되기 조금 전. 완전하게 불이 꺼지고 막이 끝나는 것을 막기 위해 문장을 이어가며 기도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