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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선아 Jan 27. 2023

사랑을 번역하는 일


#i love you

 

 친구에게서 한숨이 날아들었다. 길고 낮은 그녀의 호흡을 한참 듣고 난 후 여러 가지의 말이 떠올랐지만 나는 그 말들 가운데 어느 것도 쉽게 고르거나 내뱉을 수 없었다.    

   

 20년을 함께한 친구에게, 혹은 매일 살을 부대끼는 배우자에게, 내 몸의 일부를 떼어준 자식에게 말을 건넨다는 건 퍽 어려운 일이다. 누구보다 돕고 싶은 마음에 도리어 상처를 주기 때문이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라고 닦달한다던지 원치도 않는 응원이나 위로를 하려고 든다던지. 충고나 조언 따위 하지 말고 가만히 듣고만 있어도 될 일에 저도 모르게 입이 나서는 바람에 주워 담지도 못할 말들을 하곤 한다. 애정을 쏟는 사람에게 마음이 과욕을 부려 생기는 일이다.      


 말에 힘이 있듯 침묵에도 힘이 있다는 걸 모르던 나는 쉴 새 없이 떠들었다. 관계 속에 흐르는 침묵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떠밀리듯 하다 보니 무심코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하게 됐다. 시야는 좁은 주제에 허세와 자의식이 가득해 가르치기를 즐겨하고 일장 연설을 자주 했다. 내가 맞다는 오만으로 적잖이 폭력이었을 그 말들은 모양이 망가지거나 시들어버린 꽃다발이 되어 쓰레기통에 처박혔을 것이다. 화려하게 포장해 100송이씩 안겨 주었지만 정작 당사자에게는 썩 감흥 없는 선물처럼.  



   

 지난 내 사랑은 내가 건넨 말처럼 꽤나 일방적이었던 것 같다. 들어주기보다는 말하기를 선택했고, 상대를 살피기보다는 나 중심적인 태도가 관계의 주를 이뤘다. 너를 위한다고 말하면서 실은 철저히 나만을 위했던 날 선 그 말들이 오래도록 사무친다. 그래서 요즘의 나는 무척 조심스럽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같잖은 나의 말이 상대의 어딘가에 파편처럼 박혀 곪지 않기를 바라며 머릿속으로 하나하나 말을 세어보고 고른다. 가능한 예쁜 말을 골라서 전하고 싶다.    

 

‘친구니까 이 정도는 괜찮잖아.’

‘남편이니까 투정 좀 부려도 되잖아.’

‘자식이니까 당연히 이렇게 할 수 있지.’   


 모종의 합의를 빌어 우리는 쉽고 편한 말을 한다. 사랑이라는 이유를 들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강요하고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에 실망한다. 막무가내로 내뱉는 어떠한 말도 수용하고 수용받는 것이 친밀한 관계라는 착각에서다. 그러나 일방적이고 나태한 사랑의 말은 관계를 지켜낼 수 없다. 격의 없는 사이임을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나 있는 그대로의 나를 수용해 주길 원하는 것은 내쪽의 욕심이다. 하고 싶은 말보다 듣고 싶은 말을 찾아 꼭 필요한 선물로 만들어 주는 것이야말로 사랑의 마음을 제대로 전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결정적인 순간에서만큼은 쉽고 편한 말 대신 반드시 귀하고 좋은 말을 해야 한다.


 ‘I love you.’란 문장을 ‘달이 참 밝네요.’로 번역한 나쓰메 소세키의 일화를 언급하며 한 작가는 물었다. 사랑한다는 말에 대한 나만의 번역이 있느냐고. 당시엔 여전히 번역 중이라고 대답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1차 번역은 완성된 것 같다. 영원토록 교정과 퇴고를 반복할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이번엔 이렇게 끝마치고자 한다.


I love you.
나는 너를 위해 예쁜 말을 골라주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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