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백큐브라는 게 있어. 편백나무를 사방 1cm 정도 되는 크기의 6면체로 만든 건데, 모서리가 둥글어서 언뜻 보면 공깃돌처럼 생기기도 했지. 찜질방에서도 종종 볼 수 있고 건강 베갯속으로도 쓰이지만 가장 많이 사용되는 곳은 아마 키즈카페일 거야. 놀이터에 모래가 없는 시대잖아. 인공 모래도 많긴 한데 인공 모래는 뒤처리가 너무 까다롭고 밀가루는 말해 뭐 해. 쌀이나 콩 같은 것들은 아무래도 보존이 어렵지. 그런데 편백큐브는 가공된 나무니까 딱히 부패할 걱정이 없어. 크기도 적당하고 정리하기도 편해. 주워 담느라 허리 아픈 것만 빼면.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들이 집어삼킬 위험 말고는 안전한 편이고. 게다가 피톤치드에 항균작용까지 있다니까 왠지 좋아 보이잖아? 편백큐브방 없는 키즈카페는 거의 없을걸.
사설이 너무 길었네. 누가 보면 편백큐브 홍보라도 나온 줄 알겠어. 어느 날 키즈카페에 들렀다가 편백큐브방에 갔는데 문득 바닷소리가 들리더라고. 파도소리가. 소꿉놀이용 냄비에 음식 대신 편백큐브를 담아주려고 플라스틱 불도저를 영차 하고 밀었더니 촤르륵, 파도소리가 나는 거야. 알 수 없는 상상의 음식을 만들며 나 홀로 역할극을 하는 아이를 앞에 두고 몇 번이나 파도를 일으켰는지 몰라. 얼이 빠진 채 집착하는 사람처럼 그 소리를 들으려고. 영화 <김 씨 표류기>를 보면 주인공 김 씨가 무인도에 표류해서 실의에 빠지거든? 죽으려는 시도도 몇 번이나 해. 그러다 우연히 짜파게티 스프를 발견하게 되지. 면은 없고 스프만. 김 씨는 짜파게티를 만들어 먹어야겠다고 결심해. 오직 짜파게티를 만들겠다는 의지만으로 옥수수를 기르고 옥수수 가루를 내어 반죽을 만들어서 그 반죽으로 면을 뽑아내. 결국엔 정말 짜파게티를 먹게 된단 말이야.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명장면이지. 방금 익혀 따끈하고 칼 없이 뭉툭하게 잘린 면 위로 짜파게티 스프를 뿌린 다음 비비면서 벌써 울어. 비비는 소리가 어찌나 찌근찌근한지. 그리고 냄새를 맡거든. 짜파게티 냄새 알잖아. 그 치명적인 냄새. 죽지 않으려고 만든 짜파게티 냄새가 어땠겠니. 김 씨는 그 냄새를 착취하듯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들이마셔. 영화에서 정말 그토록 오래 냄새를 맡았는지 정확하진 않은데, 내 기억 속의 김 씨는 그래. 아이참, 또 얘기가 길어졌네. 누가 보면 <김 씨 표류기> 홍보라도 나온 줄 알겠어. 아무튼 김 씨가 짜파게티 냄새를 맡는 것처럼 나도 그렇게 파도소리를 들었단 말을 하고 싶었어. 절박한 심정이었달까. 무료한 부모들과 적당히 해맑은 아이들과 컵라면 냄새만이 가득한 키즈카페 한 구석에서.
바다에 가고 싶냐고? 아냐, 그냥 파도 소리가 좋았어. 기억의 조각들이 뭉쳐졌다 흩어졌다 쏟아지는 소리가. 나는 자주 내가 분열된 기분으로 살아. 기억을 포함해서 지금의 나, 어제의 나, 미래의 있을 나, 오늘의 나 조차. 내 심장엔 4개의 심방이 아니라 무척이나 많은 방이 더 있을 것만 같고. 말을 길게 늘이는 일이나 우왕좌왕하는 일도 그래. 때로는 조각난 내가 긴 줄을 지어 서서 말을 하기도 하고 여기저기 흩어진 채 각자 말을 해대기도 하거든. 명료한 하나의 나로 살아본 적이 별로 없어. 그런데 파도 소리는 그렇잖아. 가득 뭉쳐졌다가 마지막에 부서지는 소리니까 어차피 부서질 거라면 그렇게 가득 뭉쳐지기라도 했으면 해서. 촤르륵, 쏴- 리듬에 맞춰 부서지고 또 부서지더라도 촤르륵, 촤르륵 몇 번이고 다시 또 뭉쳐지면 좋겠다 싶어서. 이렇게 말하고 나니 너무 절절해서 웃긴다.
눈이 오네. 오늘은 날이 추워서 금세 녹지 않고 쌓일 것 같아. 차근차근 쌓이는 눈을 보면 참 좋아. 꾹꾹 눌러 뭉치지 않아도 가지런한 층계처럼 한 송이씩 쌓이는 모양이 예쁘잖아. 쌓이고 쌓이면서도 가볍고. 날 풀리면 또 더럽게 녹아들겠지. 파도는 부서져도 더럽지 않은데 이렇게 새하얗고 깨끗한 눈이 왜 녹으면 더러워질까. 사실 더럽혀진다는 게 더 맞겠지? 그래, 그렇다면 나는 눈보다 파도가 될래. 그러고 보니 눈은 겨울에만 오잖아. 파도는 사계절 내내 움직이고. 때 아닌 눈이 오면 이상 기후라고 하지? 파도는 언제나 들이쳐도 이상할 게 하나도 없는데. 오히려 멈추는 게 이상한 거잖아. 파도는 영영 안 멈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