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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영옥 Mar 24. 2022

그들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뮤지컬 <미스 사이공>

전쟁.


이 단어가 역사책 속에서만 볼 수 있는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바로 지금 내 곁에서 일어나는 일일 수도 있다는 막연한 두려움이 현실이 된 요즘이다. 피 흘리는 아이를 안고 병원으로 뛰어들어오는 부모나 피난길에 부모를 잃어 국경에서 혼자 울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나 어린이 시설에 집중 포격을 했다는 기사 등을 접할 때마다 비극을 되풀이하는 인간의 욕심과 어리석음을 원망하지 않을 수가 없다.


뮤지컬 <미스 사이공>을 보며 전쟁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슬픔은 무엇인지 생각해본 적이 있다.



뮤지컬 <미스 사이공>은 작곡가 클로드 미셸 쇤베르그와 작사가 알랭 부브릴이 함께 만든 1989년 작품이며(이들은 뮤지컬 <레 미제라블>을 만든 사람들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2006년 초연되었고 2010년 재연되었다. 워낙 유명하고 인기가 많은 작품이라 뮤지컬을 보지 않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 작품에 등장하는 노래 몇 곡은 익숙할 것이다(김연아의 2007-2008 시즌 때 프리스케이팅 곡으로 쓰이기도 했다).


베트남전을 너무도 미국적인 시각에서 접근하여 미국을 영웅적이고 인도적인 것처럼 그려내고 동양 여성을 무조건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이미지로만 그려냈다는 비판을 떨칠 순 없겠지만 기회주의적이고 현실적인 엔지니어를 통해 나타나는 시대의 아픔이나 킴을 통해 드러나는 위대한 모성애는 언제 보아도 가슴을 절절하게 한다.


나는 이 작품을 초연과 재연 모두 관람했다.




2006년도에 처음 보았을 때 정말 큰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그런데 2010년 공연은 극장의 음향 컨디션이 매우 안 좋아 너무도 실망스러웠는데, 이상하게도 공연을 보는 내내 불만족스러웠던 재연 공연 관람에서 더 많이 울고 말았다.


그것은 아마도 처음 공연을 보았을 때는 너무너무 기다리던, 너무너무 대단한 작품을 직접 보았다는 감격이 지배적이었고 두 번째 관람에서는 좀 더 내용에 집중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그 사이 나는 네 살이나 더 먹었고.


어릴 때는 그냥 킴과 크리스의 어긋난 사랑이 안타깝고 슬프고.... 뭐 그랬다. 뮤지컬 <미스 사이공>은 슬픈 결말의 러브 스토리였을 뿐. 하지만 두 번째 관람에서는 킴과 크리스의 사랑도 사랑이지만 탬을 향한 킴의 모성애와 크리스를 향한 엘렌의 사랑이 자꾸 마음에 남았다.


2010년 공연 사진


방콕에서 킴이 크리스를 찾아 그가 묵고 있는 호텔로 찾아갔다가 우연히 엘렌을 만나면서 엘렌과 언쟁을 하는 장면부터 눈물이 쏟아졌다. 한 남자를 자신의 남편이라고 여기는 두 여자의 충돌은 양쪽 모두의 입장이 너무 이해가 되기에 마음이 아팠다.


일단 나는 (당시에는 아이가 없는) 유부녀이기에 엘렌의 입장에서 먼저 생각하게 되었는데, 만약 내가 엘렌이었다면... 어느 날  남편이 갑자기 '나 옛날 애인과의 사이에서 애가 있어. 그 애를 이제 우리가 키워야 해'라고 한다면 어땠을까. 크리스 역시도 킴이 자신의 아이를 낳았다는 것을 모르고 있기는 했지만, 남편이 과거 연인과의 아이의 존재를 알리며 양육을 책임져야 한다고 하면 좋아할 여자가 어디 있을까.  


하지만 엘렌은 전쟁과 가슴 아픈 사랑을 겪으며 힘들었을 남편의 아픔을 감싸주고 자신이 그 상처를 보듬어주겠다며 더 큰 사랑을 약속하고 킴에게 꾸준히 양육비를 보내주겠다고 결심한다(결국엔 킴이 죽어서 아이를 맡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정말 이렇게 착한 여자가 어디 있나.


킴 역시도 겨우 며칠 같이 한 남자의 아이를 낳아 키우며 몇 년을 일편단심 크리스만 기다린다.


그럼 여기서 궁금한 것은, 두 여자의 이런 지극한 사랑을 받을 정도로 크리스가 매력 있는 사람인가. 이야기상으로 당연히 그래야 하는데, 극만 보아서는 그 매력을 알 수가 없다.


<미스 사이공>에서는 남자 주인공 크리스의 캐릭터가 상당히 약한 편. 전쟁터에서 킴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 건 뭐 그럴 수도. 고향으로 돌아와서 한참을 킴을 찾았다는 것도 뭐 그럴 수도.  그런데 그 이후가 좀  이해가 안 된다.


엘렌과 결혼을 할 거였으면 킴을 확실히 잊든지 할 것이지 이도 저도 아니고 밤에는 꿈속에서 킴을 찾고 현실에서는 엘렌에게 내 유일한 사랑은 당신이라 하고 킴인지 자신인지 선택하라는 엘렌에게는 화를 내고. 아니 뭐 이런 사람이?! (함께 공연을 본 남편의 한줄평은 '저 놈이 나쁜 놈이네.') 크리스 역할을 가장 잘하는 배우는 설득력 있는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배우일 거다.


2010년 공연 사진


유명한 헬기 장면에서도 너무 많이 울었다. 헬기를 타기 위한 사람들의 절박한 몸부림과 함께, 크리스는 안에서 킴은 밖에서 서로를 애타게 찾고 부르는 모습이 너무 가슴 아파서. 저 때 둘이 어긋나지만 않았더라도 이후의 비극은 없었겠지.


그리고 다들 알다시피 극은 킴의 자살로 끝을 맺는다. 전에는 그냥 킴이 죽었다는 게 슬펐는데 이번에는 킴이 자살을 선택한 이유를 생각하니 정말 눈물이... 눈물이.....


2006년 공연 사진


극 중 크리스의 대사에도 있듯이 '킴은 똑똑하니까'. 킴은 알았을 것이다. 자신이 살아 있으면 크리스와 엘렌은 아이를 데려가지 않을 것을.


초연을 볼 땐 킴의 자살이 자신의 사랑이 무너진 것에 대한 슬픔을 이기지 못한 거라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그게 아니라 아이를 미국에 보내기 위해 자살한 거였다(내가 엄마가 된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더더욱 확신한다).


아. 킴은 노래했다.


"I swear I'd give my life for you."


이 노래는 킴이 아들 탬에게 불러주는 노래이다. 아이를 위해 모든 걸 다 하겠다는 엄마의 사랑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노래였는데, 결국 그 가사 그대로 되었다. 아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지독한 모성.



킴이 죽은 후, 크리스와 엘렌은 탬을 미국으로 데리고 갔을까?


자신의 아이가 기회의 땅 미국에서 하고 싶은 걸 다 하며 살 수 있는 날을 바랐던 킴의 꿈.

크리스의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고 싶었던 엘렌의 꿈.

드림랜드 미국으로 가서 자신의 능력을 펼치고 살고 싶었던 엔지니어의 꿈.


그들이 꾼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쟁의 비극은,

모두의 꿈을 앗아가 버린다는 데에 있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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