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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로 Jul 12. 2024

<1> 1994, 중경삼림(重慶森林)

부재를 사랑하게 된다면


작중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하지무는 여자친구에게 4월 1일 만우절 믿을 수 없는 이별 통보를 받고 5월 1일까지 그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유통기한이 5월 1일인 파인애플을 꺼내 먹는다.


작품 내부에서 명확하게 언급된 날짜 덕분인지 매년 4월 1일이나 5월 1일을 중경삼림 데이로 지정해 영화를 감상하는 사람들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중경삼림의 개봉이 30년이 지난 2024년 5월 1일, 어김없이 X에서도 중경삼림이 실시간 트렌드에 올랐다. 나도 이로부터 한 달 전 중경삼림 데이에 중경삼림을 재시청하게 되었다.



반환이라는 외부 작용으로 흔들리던 시대의 공허와 허무, 방황은 영화에 녹아 필름을 구성했다. 중경삼림에서 표현되는 단어는 전부 추상적인 개념이므로 개개인의 공감 여부와 호불호가 영화의 감상에 큰 영향을 남긴다. 특히 유명한 박찬욱 감독의 중경삼림 평론이 있다. 고독한 게 뭐 자랑인가? 고독하다고 막 우기고 알아달라고 떼 쓰는 태도가 거북하다. 특히 타월이나 비누 붙들고 말 거는 장면은 그저 기가 막힐 따름이다.


비판이 가득하나 틀린 말이 아니다. 고독의 모순은 발견된다면 더 이상 고독이라는 단어로 남을 수 없는데 있다. 세상에 홀로 떨어져 있는 듯이 매우 외롭고 쓸쓸하다. 국어 사전에 정의되어 있는 '고독하다'의 정의다. 중경삼림의 주인공들은 '고독한' 삶을 보내고 있다. 하지무는 유통기한이 있는 파인애플 통조림을 사며 그녀를 기다리는 것으로, 여자친구가 떠난 663은 홀로 남은 방에서 타월과 비누에 말을 거는 것으로 자신의 고독을 표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허무와 고독감이 회자되는 이유가 있다면 나를 비롯한 관객들이 그들의 공허에 일정 이상 공감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사랑의 유통기한을 만 년으로 두고 싶다는 하지무가 기억(사랑)의 유통기한을 만 년으로 두고 싶다는 나레이션은 그를 비롯한 우리의 바람이다. 우리 모두 유통기한이 정해진 사랑의 존재를 경험했고, 아쉬워 해 왔지 않은가. 당장 어릴 때 사랑했던 사람과 물건에서 잊은 것과 잃은 것이 많다. 미래를 떠올리면 자연히 내가 지금 사랑하는 것들을 떠나 보낼 준비를 해야 한다. 다만 통조림에는 지정된 날짜가 명확하지만 우리의 유통 기한은 기간을 알 수 없어서 감히 만 년이 되기를 바랄 수도 있다.


그러나 나의 기억(사랑)도 타인(사랑)의 사랑도 영원하지 않기에 실재가 떠난 다음 고독은 남고 이를 견디기 위해 우리는 고독을 채울 존재를 새로 찾아 헤맨다. 부재는 존재를 증명한다는 말이 진실이 아닐 리 없다.




한편의 불안을 도출한다. 캘리포니아의 꿈을 꾸고 당신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로든지 떠나도 좋다는 오로지 낭만뿐인 말을 던진다. 방황은 예정 없고 기약 없는 도착지로 훌쩍 떠나고 싶은 충동을 이끈다. 홍콩의 혼란스러운 시대상은 사람이 일생에 한 번쯤 겪는 고독과 방황을 닮았다. 그 시대 홍콩의 낭만, 동경하던 분위기는 우리의 삶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고독함 안에 방황하면서 삶의 모든 것에서 떠나고 싶던 마음이 영화에 깃들어 있다.


우습게도 이런 불안과 방황은 낭만적인 미쟝센과 청춘 한켠을 만든다. 승무원이 되어 등장한 페이는 불안한 나를 어디로든 떠나게 해 줄 수 있을 것 같다는 믿음을 준다. 다른 것 없이 오로지 '당신이 있는 곳'으로 비행기를 타고 가겠다는 결심으로 우리는 언뜻 해피 엔딩을 짐작한다.


하지만 우리는 미래의 불분명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어느 지점에서 함께 했던 이들은 다시 서로를 고독에 빠지게 하는 나쁜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한때는 그것이 두려워 각자 다른 캘리포니아에서 서로를 기다리다가, 기약 없는 기다림 끝에 미래의 공허와 부재를 감수하면서도 함께 떠나기를 택한다. 방황의 끝에서 나를 알아 주는 사람을 선택하며 함부로 사랑에 빠져 기억을 남기고자 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사람의 본능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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