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한 단상
이번엔 친구 아버지께서 영면하셨다. 사실 언제 돌아가시든 놀랍지 않을 상태이시긴 했다. 그래도 친구의 카톡창이 떴을 때 가슴이 철렁 내려앉긴 했다. 친구의 결혼식 때 보았던 아버지의 미소 띤 인자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 ‘참 아버지가 좋으신 분이구나!’ 했었다.
본인의 아버지처럼 우직하고 성실한 남편을 만난 친구는 우연인지 내가 첫째를 임신하고 얼마 안 있어 첫 임신을 했다. 그래서 두 아이는 친구이다. 안타깝게도 둘째의 경우에는 친구를 만들어 주지 못했다. 나는 두 살 터울로 둘째를 낳았고, 친구는 약 두 달 후 둘째 출산 예정이다.
아버지의 병환과 뱃속에 있는 둘째가 계속 걱정되었다. 얼마 전 친구와 연락을 했을 때 아버지의 여명이 얼마 안 남으셨는데, 하필 둘째가 출산할 시기와 겹칠 것 같다고 했다. 그나마 아버지가 필사적으로 더 사시려는 의지가 있다고 했다. 그래서 조금만 더 힘내시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여명도 못 채우고 가셨다. 친구는 섭섭했겠지만, 조금 덜 고생하라고 조금이라도 따뜻할 때 가시나 보다고 위로의 말을 전했다. 사실 나의 시아버지도 그의 아버지와 같은 병명이고, 시한부 인생이라 남일 같지는 않다. 하지만 친구는 어쨌거나 육친이니 그 슬픔이나 허망함이 가히 내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이리라 생각한다.
장례식장에서 본 친구의 모습은 조금 피곤해 보였지만 그래도 건강해 보였다. 나를 보니 눈물이 날 것 같다고 해서 “괜찮아.”라고 했다. 사실 뭐가 괜찮은 건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첫째 아이는 모든 이모, 삼촌들이 모여 있으니 신이 난 것 같았다. 그나마 장례식장의 무거운 분위기를 희석시켜 주는 귀여운 존재였다. 부디 친구가 이번 상을 잘 치르고, 건강한 둘째 아이를 출산하길 빈다.
올 가을 들어 부고 소식을 너무 많이 접해서일까. 죽음이 이제는 그렇게 슬프거나 허무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망자에게는 죽음의 이유였던 그 병을 마침내 떨치게 되었으니 오히려 다행일 수 있다는 생각도 해본다. 다만 가시는 그때 사랑하는 사람들과 행복했던 순간들을 조금이라도 더 기억한 채로 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긴 한다. 천상병의 <귀천>의 시구처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이라고 여겼으면 좋겠다.
어렸을 적에 친구의 아버지는 딸이 결혼하면 풍선을 불어주겠다는 말씀을 하시곤 했다 한다. 비록 딸의 결혼식에 실제로 풍선을 불어주진 않으셨지만 그 누구보다도 환한 미소를 보여주시긴 했다. 아버지의 영정사진의 모습도 여전히 함박웃음을 띄고 있다. 표정이 너무 환해서 영정사진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친구를 너무 걱정하지 않을 것이다. 듬직한 남편과 야무진 첫째 아들, 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둘째 아들까지 있으니 말이다. 그 둘째가 외할아버지를 닮은 구석이 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든다. 왜냐하면 우리 시어머니가 유난히 시아버지를 닮은 둘째를 보면서 “나중에 이 녀석 보면 아버지 생각 많이 나겠지?” 하면서 흡족해하셨기 때문이다. (원래는 자기 남편을 닮았다고 괜히 미워하셨다.)
그렇게 어딘가에 망자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친구 아버지를 생전에 딱 한 번 보았지만 친구를 닮은 환한 미소로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듯이. 그리고 성실한 남편을 보며 그의 아버지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듯이. 죽음은 무(無)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