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버지의 암 판정
왜 불길한 예감들을 꼭 들어맞는 것일까. 시아버지는 결국 담도암으로 판정되었다. 3기 정도에 해당할 것 같다고 한다. 담도암은 여타의 암보다 예후가 좋지 않다고 한다.
마침 친한 대학교 친구의 친정아버지도 작년 담도암으로 투병생활을 하고 계셨다. 참 기막힌 우연이다. 친구에게 연락하여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궁금한 사항들을 물어보았다. 친구의 아버지는 4기에 해당하였지만, 항암이 잘 맞았고 이후 몇 개월은 정상인처럼 건강하셨다 한다. 그러다 지난 추석 갑자기 상태가 악화되었고 이후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졌다고 했다.
암환자의 말로는 거의 비슷한 것 같다. 음식을 거의 먹지 못한다. 앙상해진다. 거동이 불가능해진다. 기저귀를 찬다. 그렇게 절망적으로 죽음에 가까워진다. 가장 힘든 사람이 늘 환자 가까이 있는 보호자였다.
남편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표정을 보이더니, 곧 우울해지고, 아버지와 통화를 한 이후 살짝 눈물을 보인다. 남편은 아버지가 수술한 이후에도 그와 같은 최악의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 같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이 남편 역시 ‘설마 나에게 이런 일이 발생하겠어?’라고 극구 회피한 것 같다.
친아버지는 아니지만 나 역시 마음이 아팠다.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명치가 무엇에 막힌 듯 갑갑한 심정이었다. 그러다 눈시울에 살짝 눈물이 어리기도 했다. 그러면 다시 이성의 힘을 빌어 현실을 직시하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장지는 선친이 계신 곳으로 이미 얘기가 되어 있었다. 영정사진은 찍으셨을까? 그것은 아직 얘기들은 바가 없다. 어머니 말씀으론 예후가 좋으면 수술해서 2-3년 정도 더 사실 수 있다 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엔 2-3개월이라고 한다. 이성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나 역시 2-3개월은 배제하는 우를 범한다.
어머니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우선 아버지 휴대폰의 지문 인식 모드를 패턴으로 바꿨다고 한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중요한 연락처 빼고는 모두 정리하라고 했다 한다. 시한부 선고를 받게 되면 환자는 삶을 정리하는 단계로 접어드는 것이다. 10월부터 한 달에 한 번 관악산을 가기로 하셨다 했었는데…
어머니는 아버지가 이렇게 빨리 가실 줄은 모르셨다. 적어도 80은 사시겠거니 했다. 늘 입버릇처럼 “80세까진 좀 건강 관리 하고, 그 이후론 언제 가도 좋으니 맘대로 해.”라고 하셨다. 이젠 그 10년도 과한 욕심이 되어 버렸다.
나의 육아에 있어 가장 큰 도움을 주신 건 단연 시부모님이다. 첫째가 어느 정도 크고, 둘째도 두 돌을 넘겨 어머니의 도움이 크게 필요하지 않게 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아버지께서 발병하셨다. 어머니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빨리 가는 거 아쉽지 않게 잘해드려야겠다고 했다.
“우리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아버지 계신 동안 최대한 자주 뵙는 거야.”우울해진 남편에게 씩씩하게 말한다. “다음의 우리 이사지는 시댁 근처로 하자.” 미래의 일도 미리 기약한다. 그리고 또 우리가 앞으로 준비해야 할 일이 뭐가 있을까? 너무 모르는 게 많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차근차근히 생각하고 준비해 나가야겠다.
얼마를 사시든 아버지께서 손주들의 모습을 더 많이 담아 두시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암투병이 최대한 고통스럽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어머니의 건강이 상하지 않으시길 바란다. 나는 내 특유의 낙천성을 발휘하여 남편과 시댁의 낙담을 위로하고, 에너지를 불어넣을 작정이다.
“아직은 시간이 많이 남았어.” 남편을 다독이며 계속해서 되뇌이는 말이다. 11월의 늦가을 날씨가 유난히 차갑게 느껴지는 나날들이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