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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박사 Nov 11. 2023

운전대를 다시 잡다

feat. 칠십 세가 된 아버지들

운전을 다시 시작했다. 뇌과학에 의하면 출산 후 엄마의 뇌에는 여러 가지 변화가 생기는데, 그중의 하나가 편도체의 활성화다. 이는 촉각을 곤두 세우며 아기를 보호하려는 엄마의 생존기제이며, 임상에서는 일반적으로 알 수 없는 ‘불안’ 증세로 발현된다. 나 역시 첫째가 태어난 후 불안도가 높아져 웬만하면 위험한 일을 하지 않으려 하게 되었다. (심지어 부엌에서 칼을 사용하는 것조차 꺼려질 정도로…)


당연히 운전도 하지 않았다. 나에겐 충실하고 적어도 나보단 불안하지 않은 남편이라는 운전기사가 있었기 때문에 큰 불편함은 없었다. 그렇게 미루기 시작한 운전은 둘째의 임신과 출산으로 더욱더 ‘남의 일’이 되었다. 아이를 키워본 사람은 알겠지만, 사실 아이들이 아직 많이 어릴 때는 외출조차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정말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굳이 운전을 하지 않게 된다. (그러니까 어디 놀러 가고, 드라이브하고 그런 생활들이 어렵다는 말이다.)


그러다 다시 운전을 하기로 결심한 가장 큰 계기는 나의 아버지, 그리고 시아버지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그들의 늙음이 점점 더 와닿기 시작하면서 내가 이제 나설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두 아버지들은 올해 칠순을 맞이하였는데, 숫자의 놀음인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더 이상 예전처럼 남자답고 강하게 보이지 않았다. 시력은 점점 희미해지는 듯하고, 순발력 역시 조금씩 무뎌지는 듯했다. ‘이제 운전을 점점 줄여나가야 하겠군…!’


남편이 늙은 아버지의 몫을 모두 감내하기는 힘들다 생각했다. 이제 내가 나설 때가 된 것이다. 아직 튼튼하고, 눈도 건강하고, 제법 운동신경도 좋은 내가 남편의 우군이 되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다시 운전대를 잡게 되었다. 그동안의 편안함과 안전함의 온실에서 빠져나온 것이다.


물론 운전은 늘 사고라는 리스크가 있으며, 재수가 없을 경우 목숨까지 앗아갈 수 있는 위험한 행위이다. 그러나 세상 어떤 일이든 ‘리스크’만을 생각하고 이에만 신경 쓰게 되면 아무 일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솔직히 우스갯소리지만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만큼 인생에서 리스크가 큰 행위가 어디 있을까…?)


형법에는 “허용된 위험”이라는 개념이 있다. 어떤 행위가 충분히 위험이 예견되는 일이라도 이를 금지할 수 없을 경우를 이르는 말이다. 운전이 바로 그런 예 중의 하나에 해당된다. 위험이 충분히 예견되지만 사회적 유용성이 너무 크기에 금지할 수 없는 일들이 이 현대 문명에는 참으로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가의 아버지들은 이제 위험을 최소화해야만 하는 나이가 되었다. 그들이 운전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이제는 내가 불안하다. 어려서는 그렇게나 듬직하게 보였던 아버지인데 말이다. 이렇게 삶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는가 보다.


거의 3년의 공백기간이 무색할 정도로 나는 운전에 곧바로 적응했다. ‘이렇게나 편한 거였는데…!’ 솔직히 좀 어이가 없었다. ㅎ 물론 아직은 그래도 초보운전이라고 스스로를 세뇌시킨다. 무엇이든지 과신은 금물이다. 이제 두 아들에게도 든든한 엄마 기사가 되어줄 수 있겠군! 왠지 모르게 힘이 좀 더 세어진 듯한 느낌적 느낌. 뭐든 시작이 어려운 법이다.


이 녀석들에게 열심리 기사 노릇을 하고, 아들들이 성인이 되고, 그리고 나의 시력과 순발력의 아버지들의 그것과 비슷해지면 녀석들이 엄마를 위한 기사가 되어 주려나? (아니, 그때는 자율주행차가 모든 걸 해결해 주겠지!)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으면 좋은 점이 이렇게 현재에서 과거를 되새겨 보고, 또 그 과거가 미래에까지 이어지기도 한다는 점이다. 내 삶이 그렇게 재구성되고 다층화 된다 할까? (너무 추상적인 용어가 난무해서 무안하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행복의 가능성이 좀 더 높아진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아버지들에 대한 애정이 나의 편도체 활성을 둔화시켰다는 것. 그리고 나는 부모, 그리고 자식을 위해 용감하게 이 위험한 세상을 헤쳐나갈 준비가 되었다는 것. 실로 사랑의 힘이 아닌가 한다. 그렇게 나는 누군가의 기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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