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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박사 Jan 04. 2024

돈지랄을 경계할 것

‘완벽한 부모’ 신드롬

최근 인구학자 조영태 교수의 <인구 미래 공존>을 읽다가 초저출산에 접어든 현 세태에 육아의 양상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에 대한 내용을 흥미롭게 읽은 바 있다.


나는 초저출산 시대에 두 아이를 낳았으니, 사실 시대를 역행하는 여성에 속할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왜 이렇게 갑자기 아이를 낳지 않게 된 것일까?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겠지만, 특히 나에게는 “코호트 가설”, 그리고 “완벽한 부모 신드롬” 부분이 와닿았다.


코호트 가설에 의하면 사람들은 과거의 삶(유년기)보다 현재의 삶(성년 이후)이 더 낳으면 결혼을 하고, 그렇지 않으면 결혼을 미루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비슷한 맥락으로 ‘완벽한 부모’ 신드롬에 의하면 현 대한민국의 청장년층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완벽한 조건에 갖추어져 있지 않으면, 결혼도 출산도 하지 않겠다는 마인드를 갖고 있기에 출산율이 떨어지게 됐다는 것이다.


지금 딱 나의 세대가 결혼과 출산을 막 거치고 있는 중인데, 간혹 그렇지 않은 경우의 사례를 보면 이 가설들이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흔히들 말하기를 ”나 살기도 힘들다. “ 하는데, 이 말은 내가 어느 정도 여유가 있어야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말이다. 같은 선상에서 아이를 하나 낳았다 해도 둘째를 낳지 않는 경우의 얘기를 들어 보면, ”하나 키우기도 힘들다. “ 한다.


그러면 독신 생활을 거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또 아이를 낳은 나로서는 이 사태가 어떻게 해석될까? 우선 그 과정 속에 있을 때는 그 말이 상당히 정설처럼 여겨지는 것이 맞다. 혼자 사는 것도 힘들고, 아이를 하나 낳아서 키우는 것도 힘들다. 특히나 우리 세대처럼 잘 먹고, 잘 살고, 공부도 많이 시켜준 경우엔 그 과정에 필연적인 “희생”이 낯설고 달갑지 않다.


그런데 내 아이에게 내가 과거 누렸던 환경을 제공해 줄 수 없을 거라 생각하기에 아이를 낳지 않는다는 말은 깊게 생각해 봐야 한다고 본다.  이 ”환경“은 대부분 물질적인 것이 아닐까? 더 좋은 집, 더 비싼 옷, 더 많은 사교육…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런 것들은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긴 하다.


하지만, 과거의 나의 삶을 돌아보면 자녀 양육에 더 본질적으로 필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고 본다. 아무리 비싼 집이라도 거기에 인간적인 온기와 안정감이 없다면 공허한 공간일 뿐이고, 사교육을 많이 받아도 본인 스스로 공부할 의지가 없으면 큰 효과가 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양육의 핵심은 “정서적인 것”에 있다고 본다.

사남매의 집에서 태어났기에 나 역시 모든 면에서 풍족할 수는 없었다. 생각해 보면 공부를 열심히 했던 그 근원을 따라가 보면, 거기에 부모님으로부터의 사랑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부모의 사랑을 더 받고 싶어 말을 잘 듣고, 공부를 잘한 것이 아마 나를 인간답게 만들어준 최초의 동기일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부모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부모 자식 간의 이런 근원적 사랑의 관계가 왜곡되거나 깨질 때 거기를 메우는 것이 바로 물질, 그러니까 ‘돈지랄’이 아닐까 싶다. 내가 부모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하니, 나에게 돈이라도 많이 써줘야 그 사랑을 간접적이나마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치랄까. 반대로 부모 역시 자식의 사랑을 갈구하지만 그게 잘 안되니 자꾸 돈을 쥐어주는 것인지도…


그런 측면에서 우리 부모님을 생각하면, 나에겐 과분한 사랑을 주셨다고 말하고 싶다. 나름 본인의 위치에선 최선을 다해 나를 길러 주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바로 그 점을 깨닫게 하는 점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것이 앞으로 자식이 삶을 헤쳐 나가는 데에 큰 원동력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사족이지만 적어도 나보다는 더 좋은 조건에서 교육받은 지인이 있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 집의 부모 자식 관계는 애증 같은 것이 있었다. 얘기를 들어 보니 부모는 자식이 원하는 것을 다 사주고, 다 해줬는데도 자식이 별로 고마워 하지도 않고 생각보다 크게 출세하지 못한 것을 원망스러워했다. 반면 자식은 부모의 희생이 별로 고맙지 않았다고 했다. 왜냐하면 자식에게 쓴 그 돈들은 결국 부모의 자식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석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돈지랄 폐해의 전형적인 예라고 본다.


따라서 돈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돈을 어떻게 쓰는지가 중요하다. 그리고 부모 자식 관계의 핵심은 서로에 대한 진실한 애정이 가장 본질적인 것이며, 어쩌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올해도 우리 아이들의 현명한 엄마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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