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박사 Jan 28. 2024

영어가 뭐길래

부모의 “자식-되기”

나는 영어를 썩 잘하고 좋아하는 사람이다. (사실 영어 이외에도 다른 외국어를 여러 개 섭렵한 바도 있다.) 젊은 시절 외국인 친구들이 꽤 많았던 적도 있고, 한때는 외국 유학을 정말 진지하게 고민해 보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영어러버인지도 모른다.


첫째는 어린이집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영어를 배웠다. 사실 처음엔 아직 세돌도 안 된 아가에게 무슨 영어를 가르치나 하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하물며 한국어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데 말이다. 그래서 별 기대도 없었고, 그저 재미나게 놀고 말겠지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어느 날 어린이집 담임쌤과 학부모 상담을 하면서 첫째가 영어 시간을 유독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돌이켜 보니 집에서도 어린이집에서 사용한 영어 교재를 유난히 자주 들여다보긴 했었다. 그리고 시시때때로 영어 동요를 흥얼거리기도 했다. ‘우리 첫째가 영어에 관심이 많구나!’


그러다 지난달 어린이집 방학 기간 동안 첫째를 봐주신 시어머니 왈, 손주가 이제 더 이상 옛날 장난감들에 흥미를 갖질 않는다. 이제 얘가 제법 큰 것 같으니 교육을 시작해 보라고 하시는 거다. 늘상 하는 이야기지만 아이들은 생각보다 정말 빨리 큰다!


그때부커 이런저런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일단 할 수 있는 것부터 하자고 마음먹고 첫째에게 책을 많이 읽어주면서 이런저런 생각의 과제들을 해결하게끔 유도했다. 예컨대 책을 단순히 읽어주기만 하는 게 아니라 자꾸 말을 변형시키고 그림책의 다른 요소들에 대해 얘기해 주는 것. 같은 색깔끼리 연결시키는 것.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때 숫자가 변할 때마다 그 숫자를 말해주는 것. (창의력을 발휘하면 아주 흔하고 사소한 말과 행동이 학습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영어는 그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기껏해야 “ABC” 노래를 불러주거나(아이는 어느 순간 starbucks 상호를 보며, 그게 바로 abc노래에서 나온 기호라는 걸 알기 시작했다.)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배운 동요를 따라 불러주는 것 정도. 좀 더 재밌고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다 내가 어렸을 때 배웠던 여러 방문학습 교재들을 떠올려 보게 되었고, 유독 기억이 남는 한 업체를 염두에 두게 되었다. (생각보다 그런 업체들이 현재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을 뿐 아니라 디지털 시대를 맞아 한층 더 업그레이드 되었다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세월에 따른 물가상승의 영향으로 사교육 비용 역시 라떼의 그것보다 몇 배는 더 오르는 것이 당연지사. 과거의 추억으로만 존재하는 그 교재들은 다 사라지고 없고, 뭔가 세련되어 보이는 그런 컨텐츠들이 나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거 정도면 나도 재밌게 볼 수 있을 것 같아! 비싼 건 다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한창 남편과 이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고, 남편은 내가 좀 오버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트레드밀을 달리면서 좀 차분히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해 보았다. 내가 영어를 좋아하고 잘하게 된 이유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왜 영어를 잘해야 하는지, 영어를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도 고찰해 보았다.


내 최초의 기억 속엔 영어가 재밌다고 느낀 계기가 흥미로운 ”스토리“ 때문이었다. 이야기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해 나갈지 궁금해서 영어를 익히게 된 것이다. 마치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해독해야 이집트 문명의 정수를 알게 되는 것처럼, 언어를 체득해야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스토리“라는 요인이 나중에는 영미권에 대한 호기심(디즈니나 미드, 그리고 해외여행을 통해), 성적이나 출세에 대한 욕망으로 차례차례 변형되기도 한다.


거기다 나는 외국인 친구들을 사귀고 그들의 생각을 이해하는 데 큰 흥미를 느꼈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일종의 한 개인의 개성일 수 있는데, 나에게는 “개방감”이라는 특성이 좀 강했다. 어느 순간 한국인에게는 한국인만의 어떤 사고의 경직성이라는 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를 좀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이 외국인, 그리고 종국에는 그 언어에 대한 습득 욕망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우리 아이에게 전해주고 싶은 것이 단순히 본토 발음, 영어 단어나 문장이 아니라 바로 이 욕망(?) 혹은 글로벌 시각이다. 물론 이건 말로써 전달되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개인이 긴 시간의 인생 경험에서 부지불식 간에 습득하게 되는 어떤 특성이나 능력이라고 본다. 과연 내가 이것을 아이들에게 깨우쳐줄 수 있을까?


나 역시 수동적인 자식의 입장이 아닌, 능동적인 엄마의 입장은 처음이기에 쉽지 않다. 남편 말대로 너무 오버를 해서 영어에 넌더리가 나는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다. 이를 잘 캐치하고 수위를 조절하는 것이 부모의 핵심 역할인 것 같다.


자식 역시 부모에게는 그들과는 다른 고유의 인격체이기 때문에 속속들이 파악하기는 힘들다고 본다. 나에게는 너무 당연하고 자연스러웠던 것이 그들에게는 아닐 수도 있다. 들뢰즈의 철학에는 “-되기(becoming)”라는 개념이 있다. 이는 타자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위해 ‘나’라는 주체의 고정관념이나 편견 등을 해체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부모가 자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라떼는~’ 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자식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그때는 맞지만 지금은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하여간 그렇다면 부모의 역할, 그 선은 어디까지인가…? 이래저래 고민만 많아지지만 우리 부모들 역시 그런 과정들을 겪었고, 거기에 성공도 실패도 있었던 것처럼 나 역시 그러하겠지. 그러니까 너희들을 가르치려 하기보단 차이를 이해해 보려고 노력할게.


작가의 이전글 분리수면을 준비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