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출발 소리가 들리는 동시에 앞으로 팔다리를 재게 휘두르며 뛰어나갔다. 출발선에서 들리던 온갖 자질구레한 소음들이 순간 사라지고 내 거친 숨소리와 가슴에서 힘차게 두근거리는 심장소리만 들렸다. 아무런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무엇 하나 나를 방해하는 게 없었다. 그럴 수밖에, 지금은 내 차례고, 내 시간이니까 경주마처럼 하얀 선 사이를 달려가는 나를 방해하는 건 반칙이다. 정말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힘들다거나 멀다거나 하는 그런... 평소 귀찮게 굴던 잡념들조차 조용하다. 아니, 잡념들이 쫓아오기에는 내가 너무 빨랐던 걸까?
내 차례는 20초 남짓. 아무런 생각 없이 내달리던 어느 순간 누군가에 의해 달리기를 멈춰야 했다. 얼마나 압도적인지, 거부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십여 초 동안 무채색이었던 세상에 어두운 방 커튼이 열리듯 빛이 스며들었다. 그리고 빛을 따라 박수와 응원소리가 내 심장을 더욱 세차게 뛰게 했다. 집 앞 언덕을 쉬지 않고 뛰어올랐을 때처럼 심장박동이 온몸을 흔들리게 한다. 잊고 있던 숨도 가쁘게 뒤따른다.
여전히 내 몸을 붙들고 있던 거인이 어딘가로 숨을 고르느라 바쁜 나를 데려갔다. 데려가며 내게 말을 한 것 같은데 쾌활하게 조잘거리는 친구들의 인사에 아직도 멍하다. 순간적인 신호 소리에 급하게 피를 끌어올린 탓인지 얼굴이 후끈하다.
이끌려 도착한 곳. 고만고만한 또래 친구들이 조잘대고 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숨을 고르고 있던 나에게 굵은 목소리가 나름 친절을 담아 말하고 어딘가로 간다. 내 자리는 눈이 땡글한 계집아이 뒤 줄이었다. 힘을 다 쏟아 기진맥진 해진 나는 노란 흙바닥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격한 움직임에 놀란 심장과 호흡을 달래며 흙바닥을 바라보고 있을 때 나를 쳐다보고 있던 계집아이가 말을 한다.
"쪼그만 게 잘 달리네"
마치 자기가 누나라도 된 양 대견하다는 투로 말을 했다. 나랑 같은 반이면서. 난 초등학교 때는 항상 앞 자릴 도맡았었다. 키가 또래에 비해 작고 비루해서 가방을 메고 다니면, 마치 가방이 걸어다는 것처럼 보였다고 했다. 엄마가.
그래. 그때도 그랬다. 순간적인 달음질에 흥분해서 새 빨개진 얼굴과 귀를 쓰다듬어 주던 따스한 손길. 너무나 새빨갛고 뜨겁게 달아오른 내 얼굴이 걱정스러웠는지 물을 적신 손수건으로 토닥여주던 그 손길을...
따사로운 햇살 아래에서 멀리 봉긋하게 솟아오른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몸과 마음이 누글해지니 생각이 나풀대며 기억 속 어딘가로 나를 이끌었다. 맑고 훤한 허공에서 바람을 타며 한없이 물레의 실을 뽑아 꼬리를 살랑거리며 오락가락하는 가오리연처럼.
그만 가려무나. 쫓아가기가 버거우니 잠시만 숨 좀 돌리게. 네가 나풀대며 피워내는 아련한 향기에 눈이 시려 너를 쫓을 수가 없구나. 잠시만 숨 좀 돌리게 해 주겠니? 쌩하니 지나는 바람길에서 벗어나 저기 햇살이 속살대는 반짝이는 나뭇잎에서 쉬어가자꾸나.
길고 새하얀 꼬리에 묻은 추억은 적당히 훤한 하늘에 털어버리렴. 꼬리에서 떨어진 아롱한 추억에 눈물이 아른거려 목이 멘다. 먹먹해진 숨을 가늘게 새아리고 떨어지는 계절 속으로 한걸음 들어섰다. 나른하게 나풀거리며 나무게로 내려앉는 고고한 자태가 그리운 이를 닮았구나.
어디로 가야, 무어를 디뎌야 그리던 이를 볼 수 있을까? 하염없이 내리쬐는 햇살이 원망스럽고 네가 밉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