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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ty Feb 10. 2023

해질녘

공원의 벤치에 앉아 어스름해지는 하늘을 주황과 연분홍, 보랏빛으로 아른하게 물들이며 해가 지는 것을 보고 있었다. 주변의 번화한 도시에 어둠이 세상을 점점 둘러싸자 길가의 가로등과 상점가 간판의 불빛이 어둠을 방황하게 했다. 


이어지는 회의와 허술한 마감으로 진을 뺀 하루는 가혹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낮이 가고 밤이 오는 희미하지만 짙은 이 순간이 마음을 뺏는다. 석양이 내뿜는 기운에 달큰하게 물든 허공을 보잘것없는 비닐봉지가 분주히 떠도는 모습에 헛웃음이 난다.


처음 도시의 빠른 속도가 낯설어서 헤맨 적이 있었다. 열렬히 푸른빛을 갈망하는 인간과 자동차 틈에서 어쩔 줄 몰라서 허둥대며 벌벌대는 애송이시절이 있었다. 끊임없는 소음, 자질구레한 빛들의 향연, 끝나지 않는 오늘. 북극성을 분실해 버린 나침 바늘처럼 갈 곳을  몰라서 낯선 사람과 장소를 방황했다. 뱅글뱅글. 아찔한 현기증이 차츰, 차츰 사그라들고 싸한 내음이 희미해질 즈음에서야 걸음을 똑바로 할 수 있었다. 


저 너머 붉은빛을 째려볼 필요 없고, 저기 코너를 돌아 나오는 35번 버스에 주머니의 스마트폰을 부여잡을 필요는 없다. 조급증을 낼 필요 없이 사람들 걸음에 맞춰 건너면 되고, 멀어지면 검은 매연을 품어내는 녀석에게 뻔한 한숨만 안겨주면 그만이다. 이런 순간엔  도를 늦추고, 심호흡을 하고, 삶의 단순한 즐거움을 감상할 만한 대상을 찾으면 된다.


어둠에서 나를 지켜주는 환한 가로등 불빛 너머로 가족들의 손을 잡고 웃고 떠드는 아이의 얼굴을 바라봤다. 아이의 해사한 웃음이 싱그럽게 마음을 애잔하게 한다. 하나 둘 집으로 향하는 사람들. 검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커다란 가방의 무게에 짓눌려 바닥을 보고 가는 학생, 청명한 소리를 내는 검은 비닐 속 알듯한 물체를 양복쟁이가 그 뒤를 따르고, 그리고 낡은 벤치에 앉아 거리를 지나는 이들을 멍하니 바라보는 나. 연인들이 함께 노을을 바라보며 낭만적인 산책을 하는 그런 정경이 아니다. 하지만 낭만과 사랑, 미래,  희망을 품은 생생한 삶을 사는 그들의 모습에 마음이 막연해진다. 


이제  해가 완전히 지고, 하늘은 짙푸른 그늘로 변했다. 도시는 자동차 소리와 사람들이 공기를 가득 채우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다시 살아나고 있다. 하지만 석양에 대한 기억, 그리고 그것이 남긴 잔향은 아직 내 주변을 어른거리고 있었다. 노을이 묻히고 간 살가운 분홍이 쌀쌀한 심경을 은근슬쩍 데웠는지 가느다란 숨이 훈훈하다.


호주머니에 주먹을 깊이 박아 넣고, 주머니 속에서 양손을 배꼽까지 잡아 모았다. 그리고 고개에 힘을 줘서 수그리고 입을 앙다물어 긴 숨을 뱉었다. 이렇다 할 생각이 나 고민을 하지 않았지만 뭔가를 결정해야 할 것 같아서, 무언지 모를 핑곗거리를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그러길 잠시, 이렇다 할 결정을 하지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을 했다. 그리고 양발을 살짝 들고는 이내 힘 있게 구두굽으로 땅바닥을 찧고 일어났다. 나도 저들처럼 훈훈한 집으로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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