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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준 Mar 19. 2023

할 수 있었고, 될 수 있었던 존재가 아니라는 확신

완벽한 음악을 들으면 죄책감이 든다. 데릭 앤 더 도미노스의 ‘레일라(Layla)’와 뉴 오더의 ‘에이지 오브 콘센트(Age of Consent)’의 연주 부분, 키스 자렛의 <쾰른 콘서트>와 글렌 굴드가 연주한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앨범을 들을 때가 그렇다.


타고나길 오만하여서, 분에 겨운 호강에 따르는 죄의식은 아닐 것이다. 절대자 앞에서 작아지는 심정이라기엔 나는 나를 너무도 드높이는 경향이 있다. 가사가 아니라 연주 앞에서만 무릎 꿇는 걸 보면, 이러한 가책은 분명 나 자신의 투영일 것이다.


나는 가야 할 길을 잃었다. 그러나 완전한 음악을 듣고 나면 깨닫는다. 그들이 간 길이 옳았다는 걸. 누구도 정해놓진 않았지만 그 선율과 박자 외에는 잘못되었다. 가야 할 시간으로만 향하는 연주들. 흔하디 흔한 양식, 생계라는 현실에의 안주가 잘못임을 받아들인다.


한 줌의 망설임 없이, 조금의 곁눈질도 하지 않은 채 나아가는 이에게는 어떤 섬광이 스민다. 온갖 사연으로 그 길을 외면했던 나의 비겁과 대비되는 영광들. 곁불처럼 쐬고 있다. 나태와 변명으로 이상 근처에도 도달하지 못한 내가. 죄책감을 느끼며. 할 수 있었고, 될 수 있었던 존재가 아니라는 불편한 확신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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