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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준 Aug 11. 2024

가장 먼 기쁨

<새벽의 모든>

미야케 쇼는 내게 가장 먼 기쁨이다.     


영화는 자기가 좋으면 그만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완전한 거짓이다. 그렇다면 평론은 인상을 늘어놓은 것에 불과할 테고 영화제 시상은 부조리한 행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고전/정전 목록은 취향 리스트와 동의어가 될 테고 영화 또는 예술과 관련한 학문은 애초에 성립할 수 없을 것이다. 영화=취향이라는 공식이 전부라면, 영화에 대한 어떠한 보편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더 나은 평가가 있으며 그렇지 못한 평론이 있다. 따라서 신뢰할 만한 의견도 존재한다. 그러한 의견은 거기에 동조하지 않을지라도 경청의 여지가 있다. 내게는 여기서부터가 문제다. 믿을 만한 평론가―이론 면에서는 유운성, 진정성 면에서는 남다은 등―가 감독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고, 그를 둘러싼 명성이 일본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수준에서 형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굳이 어려운 말을 쓰자면 미야케 쇼에 대한 상호 주관성이 형성되었다.)     


내가 보지 못한 어떤 면이 그의 작품에 있을 것이다. 대체 뭘까, <새벽의 모든>을 보고 다시금 생각한다. 여전히 나는 그의 작품에서 좋은 면을 거의 발견하지 못했으므로. 게다가 내가 좋아할 만한 요소가 적지 않은 작품이었는데도 나는 감동은커녕 지루함까지 느꼈다. 중간에 타율이 높은 개그가 나와서 견딜 수 있었지만 그래도 전반적인 면에서는 흥미롭지 않았다. 아래는 그러한 소감의 고백이다.     


후지사와(카미시라이시 모네)와 야마조에(마츠무라 호쿠토)는 둘 다 마음의 병을 앓는다. 영화의 시작은 후지사와의 고통을 비춘다. 비 오는 날, 후지사와는 벤치 위에 누워 고통스러워한다. 정돈되어야 할 가방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다. 목적지로 자신을 이끌 버스의 출입구가 열렸음에도 그녀는 움직일 수 없다. 흐트러진 일상과 삶의 방향 상실을 두세 개의 숏으로 보여주는 경제성이 돋보이는 장면. 그러나 여기까지다.     


영화가 사실의 재현일 필요는 없지만 재현에서의 사실성은 있어야 한다. 후지사와와 야마조에는 둘 다 병을 앓는다. 그럼에도 그들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너무 쉽게 웃는다. 이들에게 병환은 수렁이라기보다는 지나갈 것임을 아는 체험에 지나지 않는 듯하다. 그렇기에 둘이 연대하여 성장할 것도 쉽게 상상이 된다. 실제로 작품의 끝무렵에서 엄마의 도움을 받던 후지사와는 엄마를 간호할 정도로, 주변에 둔감하던 야마조에는 사장을 위로할 정도로 성숙해진다.     


두 인물이 일하는 ‘쿠리타 과학’은 유토피아처럼 보인다. 둘의 일탈이 여기에선 너그럽게 수용되고, 둘에게 주어지는 업무 역시 과중하지 않다. 필요시에는 너무도 쉽게 외출과 조퇴가 허락된다. 인물의 고통과 공감할 여지가 없기에 관객은 두 인물의 아픔을 남의 나라처럼 쳐다볼 수밖에 없다. 게다가 둘은 가히 이상적이라 할 만한 공간에서 근무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둘에게 마음을 줄 수 없었다.     


감독은 특별한 것 없어 보이는 일상에서 의미를 건져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우리가 보는 별빛은 우주에 있는 별이 몇백 년 전에 보낸 것이다. 16mm 필름으로 상영된 화면은 관객이 2020년대에 보고 있다고 할지라도, 30~40년 전의 정서를 전한다. 필름의 빛은 그래서 별빛처럼 노스탤지어를 품는다.     


작품의 질감은 전반적으로 그리움을 머금고 있다. 그립다는 것은 이전에는 의미가 존재했다는 것, 그렇기에 이 세상에 의미가 태동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이미 존재한 적이 있으니까). 다시 말해 그리워하는 자는 현재 힘들지라도, 그러한 고통이 해결될 수 있는 것임을 믿는다. 감독은 이러한 전제를 설득하려 하기보다는 이러한 전제에 동의하는 이에게만 말을 거는 것 같다.     


나아갈 길을 안내한다는 북극성 이야기, 과거에서 두 인물을 미래로 나아가게끔 하는 30년 전 대선배의 글 등은 다음을 암시한다. 1. 발견할 준비만 되었다면 세상은 우리에게 의미를 선사한다. 2. 생의 어떤 지점에서 무언가가 잘못되었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세상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주변에 둔감한 자신의 문제이다. 정리하자면 모든 문제는 개인의 시점에서 비롯되며 모든 해결 역시 개인의 자각에서 태어난다.     


엔딩은 이러한 태도의 절정이다. 여러 인터뷰에서 보여준 영화사에 대한 감독의 해박한 지식에 근거할 때 이러한 추측을 무리하다고 치부할 순 없을 것이다. 카메라가 공장의 정면을 비춘다. 이 층의 창문에서 누군가가 창을 만진다. 그러다가 문에서 회사 직원들이 나온다. 공놀이하는 등 공장 앞에서 움직인다. 그러다가 야마조에는 자전거를 타고 편의점에 간다. 자전거를 탄 사내가 카메라 앞을 지나간다.     


작품의 엔딩은 최초의 영화라 불리는 뤼미에르 형제의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을 연상시킨다. 첫 번째 영화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담은 것이다(뤼미에르 형제가 공장 안에 대체 몇 명의 노동자를 넣은 것일까, 라는 의문을 불러일으키긴 한다). 사람들이 일상을 지겨워하는 것은 일상이 무의미하기 때문이 아니다. 공장에서 나오는 것, 즉 아주 보통의 삶도 이미 충분한 기적을 배양하고 있기 때문이다. 뤼미에르 형제는 그것을 필름으로 보여줬을 뿐이다.     


다시 말해 세상은 늘 온전한 형태로 존재하고, 그것의 충만함이나 의미를 놓치는 이가 있다면 그것은 세상에서 그렇게 느끼는 행위자나 감상자의 문제라는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근본 전제에 동의하지 못하기에 <새벽의 모든>과 미야케 쇼의 작품에 동조하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세상은 별 볼 일이 없기에 인위를 통한 환상이 수혈되어야 하고, 어떠한 은총을 필름에 담아내야 하는 게 감독의 역할이지 않을까.     


물론 이런 장면을 예로 위의 언급에 반대할 수도 있겠다. 후지사와를 향할 때 전반적으로 어두운 공간에 머물던 야마조에에게 눈이 부실 정도로 햇빛이 쏟아진다(인스타그램의 필터 보정과도 같은 다소 과도한 빛). 초등학교에서 시연된 별자리의 전경이 흐드러지게 펼쳐진다. 어떤 이는 여기에서 신비함 엇비슷한 걸 볼 수도 있겠다.     


나의 경우에는 그렇지 못해서 야마조에가 후지사와를 찾아갔을 때 키스라도 했으면, 하는 헛된 상상까지 했다. 여태 진행된 영화의 톤에서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임을 알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영화에서 비일상성을 바라는 사람이기에. 그래서 미야케 쇼는 내게는 여전히 낯선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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